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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식 전 남양유업 회장. 연합뉴스
홍원식 전 남양유업 회장. 연합뉴스

얼마 전 지인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달리기 모임’에 가입한 갑돌이. 그는 이 모임의 대표를 뽑은 선거에 후보자로 참여해 자기 자신을 찍었다. 이런 ‘셀프 투표’는 누가 봐도 문제 될 게 없다.

그런데 만약 이 모임에서 신제품 고성능 러닝화 경품을 갑돌이에게만 주는 안건을 놓고 회원들끼리 투표한다면 어떨까? 또 갑돌이가 이 투표에 참여하는 게 과연 바람직할까?

문제 있어 보이지만 국내 상장회사에선 비일비재한 일이다. 이런 관행에 반기를 든 자산운용사가 제기한 소송의 결과가 이달 말 나온다. 다른 기업들에 미칠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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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금융 투자 업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7민사부는 오는 31일 남양유업 심혜섭 감사가 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주주총회 결의 취소 소송’의 판결을 선고한다. 심 감사는 남양유업 지분 3%를 보유한 사모펀드 차파트너스자산운용이 지난해 3월 ‘주주 제안’을 통해 선임한 인사다.

소송의 핵심은 홍원식 전 남양유업 회장 등이 지난해 3월 열린 이 회사 주주총회에서 ‘이사의 보수 한도’를 50억원으로 정한 결정을 취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남양유업 지분 51.68%(2022년 말 기준)를 보유한 최대주주이자 사내이사인 홍 전 회장이 자신을 포함한 이사들의 급여를 정하는 주주 투표에서 ‘셀프 찬성 표’를 던진 건 위법이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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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근거로 상법을 들었다. 현행 상법 제368조 3항은 “총회의 결의에 관하여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자는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남양유업의 이사 보수 한도는 홍 전 회장의 개인적 이익, 즉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만큼 그가 안건 투표에서 빠지는 게 맞는다는 게 심 감사의 주장이다.

차파트너스 쪽은 홍 전 회장의 급여뿐 아니라 이사 보수와 연동된 그의 퇴직금도 뻥튀기됐다고 보고 있다. 합법적이지 않은 주총 결의를 통해 거액의 보수를 받아 가는 건 위법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홍 전 회장은 앞서 올해 1월 남양유업 최대주주가 사모펀드 한앤컴퍼니로 바뀌며 지난 3월 회장에서 사임한 바 있다. 홍 전 회장의 퇴직금 약 170억원은 아직 지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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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나올 재판부의 판단에 시선이 쏠리는 건 국내에선 기업의 등기이사인 지배주주가 자신을 포함한 이사들의 보수 한도를 정하는 주총에서 홍 전 회장처럼 찬성표를 행사하는 게 흔해서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올해 초 펴낸 보고서에서 자산 1조원 이상인 국내 상장사 332개의 ‘지배구조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2020∼2023년 이사 보수 한도 안건을 포함한 주총 총 722회 중 특별 이해관계자인 지배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한 사례가 3건(0.4%) 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지주회사 엘지(LG)와 경동나비엔 정도만 상법상 합법적인 요건을 지켰다는 것이다.

업계에선 이번 판결이 향후 비슷한 분쟁에서 주요 참고 사례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간 대형 상장사를 중심에 두고 상법상 ‘특별 이해관계자의 의결권 행사 제한’ 문제를 다룬 판례가 많지 않았던 까닭이다. 판결 결과에 따라 기업들의 기존 보수 책정 관행도 바뀔 여지가 적지 않다는 이야기다. 상법에 밝은 한 법조계 인사는 “회사의 등기이사인 대주주는 자기 보수 문제에 특별 이해관계가 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라며 “향후 주총에서 지배주주인 이사와 일반 이사의 보수 한도를 구분해 표결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