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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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집

3월21일 인천공항을 출발해 그날 밤 늦게 빈에 도착했다. 도착 다음날 엘프리데 옐리네크(Elfriede Jelinek) 원작인 <바벨(Babel)>이란 신작 연극을 봤다. 옐리네크는 200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스트리아 여성작가다. 기성 도덕관을 거스르는 그에게 우파는 “문화의 모욕자”라거나 “빨갱이 포르노 작가”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런 옐리네크의 신작이었던 만큼 큰 기대를 걸었으나 결과는 그에 못미쳤다.

23일은 비가 내렸으나 전차와 버스를 갈아 타고 마리아 구깅(Maria Gugging)이란 마을에 있는 정신의과전문 요양소를 찾아갔다. 빈 시내에서 1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으나 주변이 조용한 구릉지였다. 숲에는 눈이 하얗게 남았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오르막길을 15분 정도 걸어올라가자 목적지인 ‘아르 브뤼트 센터(Art Brut Center)’였다. 그곳은 이 요양소 내의 ‘예술가의 집’이라는 시설에서 생활하는 환자들의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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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여년 전 일본 텔레비전방송 다큐멘터리 프로를 보고 이런 시설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 프로 리포터를 한 사람은 미야기 마리코라는 베테랑 여배우였다. 환자 한 사람은 매일 엄격한 일과로 식당 테이블의 정해진 자리에 앉아 경탄할 만한 집중력으로 세밀한 그림을 그렸다. 미야기 마리코가 곁에 앉아 “무얼 그리고 있어요?”라고 아기에게 얘기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를 걸자 그는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언짢은 표정으로 “방해되니까 거기 비켜줘”라고 했다. 상대가 머나먼 일본에서 촬영하러 왔다는 것, 유명한 여배우라는 것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만의 상상력의 성에서 긍지 높은 성주였고 누구도 자신의 성역을 침범하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투였다. 나는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흥미로운 개성, 작품이 지닌 힘에 푹 빠졌다. 그때 이후 언젠가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아르 브뤼트 센터에서 실제로 본 여러 작품들에 나는 놀랐고, 아주 만족했다. 우리가 통상 ‘정신병 환자’라든가 ‘지적 장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예술작품에 최초로 주목한 것은 한스 프린츠호른(Hans Prinzhorn)이란 독일 정신의학자다. 치료 때문에 많은 환자들을 접해온 그는 1922년에 출판한 책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정신병환자를 ‘예술가’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치스의 대두는 이런 연구를 크게 정체시켰다. 뿐만 아니라 나치스는 민족의 피에서 열등요인을 제거한다는 우생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수만명의 정신병환자와 장애자들을 계통적으로 말살했다. 당시 주류 의학자나 정신과학자도 이런 말살에 가담했다. 국민 다수는 그것을 지지하거나 방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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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 환자의 예술에 높은 가치를 인정하고 거기에 아르 브뤼트, 프랑스어로 “적나라한 예술”이라 이름붙인 것은 20세기 프랑스의 거장 장 뒤뷔페(Jean Dubuffet)였다. 그는 아르 브뤼트 예술가들의 불타오르는듯한 표현력과 아카데미즘에 오염되지 않은 독창성에 강한 감명을 받고 많은 작품을 수집해 로잔느에 미술관을 세웠다. 뒤뷔페는 연민이나 동정 따위가 아니라 존경의 염을 갖고 그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창조성이라는 게 놀라울 정도로 순수한 형태로 빛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직업예술가가 아틀리에에서 타성적으로 생산하는 작품에 있기 쉬운 타협이 일절 없다”라고 뒤비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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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예술행위를 할까, 원래 인간이란 뭔가, 이런 근원적인 물음이 거기엔 있다.

이 요양소에 심리요법을 위한 아트 센터가 창립된 것은 1981년이고, 그것을 ‘예술가의 집’이라 개칭한 것은 1986년, 그러니까 겨우 20년 전이었다. 환자들 작품과 미로, 피카소, 에곤 시레 등의 거장들 작품과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도 없는, 환자가 치료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환자이기도 한 예술가가 창작하고 있는 것이라는 게 개칭 이유라고 한다.

아르 브뤼트 센터 복도에서 본 적이 없는 중년남성 두 사람이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그들도 정신병환자인 듯했다. 그들은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정중하게 “당신도 이곳의 예술가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악수를 하면서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라고 대답했다.

 성공회대 연구교수
성공회대 연구교수

좀 떨어진 곳에 ‘예술가의 집’이 있었다. 외벽은 분방한 벽화로 채워졌다. 가까이 가서 보니 식당에서 예술가들이 조용히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창 너머로 눈이 마주친 한 사람에게 모자를 들어 인사를 보냈더니 상대방도 오른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지금 내게 인사하는 이 사람은 다른 시대, 다른 사회였다면 경멸당하고 따돌림당했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학살당했을 것이다. 우리들 다수는 자신을 ‘정상’이라는 관념의 감옥에 가둬놓음으로써 안심하고자 한다. 그런 우리는 언제라도 ‘이상’한 것을 배제하고 학살하는 폭력의 가담자가 될 수 있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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