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 현상 중 하나가 여행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거 괴로운 일이다. 돌아다니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내가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히말라야 여행 후기를 다 찾아 읽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지인들 중에 여행 못 가서 몸살이 난 이들 몇몇은 내가 사는 섬엘 왔다 갔다. 그럼 나는? 그들은 섬이라도 와서 갈증을 푸는데 나는 어떡하라는 말인가. 그래서 다녀왔다. 어디로? 전라북도 익산으로. 한때 일본식 이름인 이리로 불렸던, 마한·백제문화권의 중심지역으로.
익산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윤흥길 선생의 연작소설 <소라단 가는 길>(창비, 2003)이다(내가 소설가이니 어쩔 수 없다). 초로의 사내들이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돌아가며 옛날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히죽거리며 방죽을 걸어 다니던 미친 여자, 방죽 아래로 떠내려 온 흑인 아기 시체, 담력 시합을 벌이다 열차에 받혀 죽은 무환이, 행사 때마다 손가락 깨물어 혈서를 쓰던 창권이. 일본 밀항과 빨치산 입산이라는, 극히 다른 두 길로 인생이 나뉘어버린 금옥과 명주(둘은 친구), 부모가 죽창에 찔려 죽는 모습을 본 뒤 시력을 잃어버리는 명은이….
내가 익산에서 처음 들른 곳은 천주교 순례지 중에서는 축복받은 곳이라는 나바위 성당. 고딕형 벽돌과 한옥이 뒤섞인 모습이 매력 있기도 했거니와 예술의 거리와 익산근대역사관도 나쁘지 않았는데 마음 들어차게 흡족하지는 않았다. 자꾸 더 옛날로 가고 싶기만 했다. 어쩌면 우리나라 뒤틀린 근대의 뒤끝에 요즘 특히 넌더리를 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소라단 가는 길 탐사도 미루고 찾아간 곳이 금마면의 미륵사지이다. 이미 저녁이었다. 저 뒤로 430미터 미륵산이 어둠에 젖어들기 시작했고 그곳과 이곳 사이를 채우고 있는 숲이 밤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만큼 황량함이 더 도드라진, 널따란 절터.
‘맞아, 이곳이야.’
내 속에서 내가 말을 했다. 이를테면 유럽의 도시마다 떠억하니 자리 잡고 있는 고성(古城)은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나를 짓눌렀다. 가는 곳마다 매번 성의 위용과 과도한 중세 역사 정보에 골이 다 지끈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떠나간 사람이 남겨 놓은 유일한 흑백사진 한 장 같은, 최후의 몸부림처럼 서 있는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20년 전에 해체 보수 정비를 했다) 외에는 모두가 상상으로 채워야 할 공간이었다. 이런 곳은 가만히, 오래 앉아 있게 된다.
“아주 옛날의 흔적들을 서로 이으려면 판타지가 개입돼야 합니다.” 아라온호를 타고 북극해 갔을 때 극지연구소 남승일 박사님이 하셨던 말이다. 그는 수백만 년 전 아프리카의 화산 폭발 흔적을 북극바다 펄 속에서 찾아내는 연구 같은 게 특기였다. 글쎄, 미세한 흔적들을 가지고 그 먼 옛날의 정황을 끼워 맞추려면 판타지 말고 뭐가 있겠는가.
여행의 최고 매력은 낯선 곳에서 낯선 인물과의 조우이다. 미륵사지에 그게 있었다. 밤늦은 시각 석탑 옆에서 홀연히 나타난 이는 무왕이다. 백제 30대 왕. 일명 마동이이자 의자왕의 아버지. 미륵사는 당장, 그가 아내의 청을 받고 창건한 절 아닌가.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버지가 용(龍)이라던데 그러면 용은 파충류가 아니었던 모양이죠?(나도 잘 몰라. 어쩌면 엄마가 원치 않은 임신을 해서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겠지 뭐). 오, 전쟁을 자주 벌인 분답게 상당히 쿨하시군요(그래야 전쟁을 치르지). 근데 전쟁은 사람을 많이 죽게 하잖아요(어쩔 수 없어. 가장 중요한 게 농사지을 백성을 확보하는 거였으니까, 저들이 데려간 사람들을 다시 찾아오는 게 전쟁이었어). 그랬군요. 재미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수나라를 꼬드겨 고구려를 치게 해놓고 정작 백제는 참전을 안했던데요?(신라가 뒤통수를 칠 게 뻔한데 어떻게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올라가? 수나라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삼국이 위태로운 힘의 균형으로 이어지던 때라서 늘 아슬아슬했지) 좋습니다. 신라 선화공주를 꼬시려고 노래를 만들어서 퍼뜨렸잖아요. 뛰어난 기획력에 발군의 작사, 작곡 능력을 겸비하셨던데(흠, 내가 좀 재주가 많긴 하지). 그래도 운이 좋으셨어요. 요즘은 그런 가짜뉴스 때문에 세상이 뒤집어질 지경인데(그건 뭔 소리야?) 아닙니다. 암튼, 쌍릉이나 왕궁리, 궁남지 같이 추억 어린 곳이 여러 군데일 텐데 왜 이곳에 계시는 건가요?(여긴 우리 왕조의 가장 큰 절이었어. 내가 유난히 신경 써서 만들었지. 그런데 이렇게 빈 벌판만 남아 있잖아. 그게 가슴이 아파).
그리고 그는 바람처럼 석탑 뒤로 사라졌다. 700년 왕조 소멸의 쓸쓸함에 오랜 시간의 무상함이 더해져서 나 또한 아련했는데, 위대한 왕이래도 죽으면 결국 무능력한 귀신에 불과하구나, 하는 심상까지 뒤엉켜 더욱 그랬다.
며칠 더 머물면서 선화공주도 만나고 싶었으나(근처에 있을 게 분명하니까) 추석이 다가오고 있어서 나는 돌아와야 했다.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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