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광역시의 근현대 역사공간 활용 방안을 두고 우려 섞인 시선이 나온다. 옛 전남방직에는 일제 강제동원 내용이 빠진 채 근대산업 역사관을 추진하고, 옛 적십자병원에는 기존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와 기능이 겹치는 인공지능(AI) 트라우마 치유 실증센터를 조성하기로 발표해 공간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일제 강제동원 빠진 옛 전남방직 역사관
광복 80주년을 맞아 옛 전남·일신방직 터에 일제 강제동원 역사관을 만들겠다고 약속한 광주시는 석달 만에 입장 변화를 보이며 시민단체의 반발을 샀다.
광주시,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광주시민단체협의회 등의 말을 종합하면 광주시는 지난 8월13일 보도자료를 내어 광복 80주년을 맞아 북구 임동 옛 전남방직 터 역사문화공원에 ‘일제강제동원시민역사관’(가칭)을 조성한다고 밝혔다.
전남방직의 전신 종연방적(가네보방적)은 1935년 일제가 설립해 수많은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군수물자 등을 생산한 곳이다. 화력발전소, 고가수조(물탱크) 등 남아 있는 시설물은 전국 유일 일제강점기 산업유산으로 꼽힌다. 광주시는 해당 시설 보존과 역사관 설립 등을 조건으로 개발업체에 개발 허가를 내주었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이틀 뒤 ‘광복 80주년 경축식’에서 일제강제동원시민역사관 조성, 고 이금주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장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참전기념탑 건립 등 ‘광주의 세가지 약속’ 실현을 다짐했다. 강 시장은 “옛 전남방직 터는 일제강점기의 가슴 아픈 수탈과 강제동원, 산업화 시기 공장 노동자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공간”이라며 “역사관은 일제 강제동원의 부당함을 알리고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성찰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자리에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도 참석했다.
하지만 두달 뒤인 10월14일 광주시청 1층 시민홀에서 열린 ‘옛 전방·일신방직 터 내 공원 조성을 위한 지명설계공모’ 당선작 설명회는 이런 내용이 빠진 채 진행됐다. 개발사업자인 ‘챔피언스시티복합개발피에프브이(PFV)’가 진행한 공모 결과 당선작은 화력발전소에 공연장, 보일러실 1~2에는 근대산업 노동박물관, 방직체험관 등을 조성하겠다고 했을 뿐 강제동원에 대한 내용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예산은 사업자가 광주시에 지급하기로 한 공공기여금 5899억원 중 550여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광주시는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시민이 사랑하는 도심 속 명품 공원이 되길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광주시의 입장은 지난달 13일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등 광주시민단체가 연 시민사회토론회에서 명확해졌다.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역위원회, 광주진보연대 등 시민단체는 광주시장이 약속한 일제강제동원시민역사관의 설립 여부를 묻자 광주시 담당 공무원은 “일제강제동원시민역사관 건립은 확정되지 않았으며 개발사업자와 논의 과정에 있다. 문화공원 콘텐츠는 개발사업자가 정한다”고 밝혔다. 지난달 26일 간담회에서는 “강제동원 역사관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비쳤으나 확답은 하지 않았다.
전은옥 광주시 문화체육실장도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8월15일 시장님 발표는 약속을 실천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며 “광주시는 의지를 가지고 개발사업자를 설득하겠다”고 밝혔다.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역위원회 위원장은 “강제동원 내용이 빠진 채 공모안대로 역사관이 만들어지면 광주 한복판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근대화시켰다’는 뉴라이트 사관의 박물관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광주시는 개발사업자에게 끌려다닐 게 아니라 역사관에 최소한 들어가야 할 것과 들어가서는 안 될 것에 관한 기본 방향을 정해놨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개발사업자 쪽은 “광주시와 시민단체 뜻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옛 적십자병원에 뜬금없는 AI 트라우마 치유 실증센터
1965년 문 연 옛 적십자병원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총격에 다친 시민을 위해 헌혈 행렬이 이어지던 공동체의 상징 공간이다. 1996년 4월 서남학원재단이 인수해 서남대병원으로 바꿔 운영하다 경영 악화로 2014년 폐쇄된 뒤 방치됐다. 2018년 교육부로부터 법인 해산, 폐교 명령을 받은 서남학원이 2019년 적십자병원 터 공개 매각을 추진하자 막개발로 5·18 사적지가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에 광주시가 2020년 매입했다.
지난 5년간 광주시와 5·18단체는 병원 건물 활용 방안을 고민했다. 2022년 12월 5·18기념재단은 광주전남연구원에 용역을 의뢰해 게스트하우스, 여행자 안내센터, 옥상 정원 등 오월길 방문객과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삼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광주시가 병원 건물을 리모델링해 트라우마 치유 실증센터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밝히자 5·18단체 등 광주시민사회는 의견이 분분하다.
지난달 19일 광주시는 ‘옛 광주적십자병원 보존 및 활용 사업 공청회’를 열어 건물 1층 응급실·진료실은 원형 보존해 전시하고 헌혈센터, 디지털역사관을 설치하겠다고 했다. 2층에는 인공지능 기반 트라우마 치유 실증센터와 의료·건강돌봄 창업 지원 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다. 3층에도 수면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트라우마 치유 실증센터를 설치하고 헌혈실·중환자실·수술실은 보존해 공개한다. 옥상은 전망·휴식과 함께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명상 프로그램 운영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건물 복원과 재건축은 290억원(국비 199억원, 광주시 91억원)을 들여 2028년까지 마치고 트라우마 치유 센터는 210억원을 투입해 내년부터 2030년까지 완성하기로 했다. 창업 지원 프로그램은 2028년부터 추진할 방침으로 예산 규모는 검토 중이다.
공청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가 이미 운영에 들어간 상황에서 ‘뜬금없다’는 반응이다. 앞서 광주시와 시민들이 구성한 ‘5·18민주화운동 정신계승위원회’도 광주시가 이런 계획을 안건으로 상정하자 재검토 의견을 내놓으며 공청회를 열어 시민 의견을 들어보자고 했다.
문성옥 5·18유족회 사무총장은 “광주에는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와 옛 가톨릭센터(현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옛 상무대 영창(5·18자유공원), 옛 전남도청, 국립5·18민주묘지 등 5·18 관련 시설이 다수 있는데 이번 적십자병원 활용 방안을 보니 중복되는 점이 많다”며 “짜맞추기식 계획보다는 차라리 5·18단체 공간을 활용하게 해달라”고 밝혔다.
시민군 기동타격대원이었던 김태찬씨는 “5·18 관련 공간을 나눠 옛 전남도청을 항쟁의 공간, 국립묘지를 추모의 공간, 5·18자유공원을 인권의 공간으로 놓고 옛 적십자병원은 생명과 나눔의 공간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병원 2층은 공동체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기능적인 측면을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광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광주경실련) 건축도시위원장을 맡고 있는 서재형 건축사는 “공공 건축 사업을 할 때 담당 공무원들이 계속 바뀌며 용두사미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맥락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총괄 건축가 또는 총괄 계획가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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