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안산시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말리카(가명·13)는 ‘글’을 잃었다. 러시아 출신인 말리카는 한국에서 일자리를 얻은 엄마를 따라 3살 때 한국에 왔다. 집에서 부모와 러시아어로 소통하지만 한글과 러시아 글자를 익히지 못했다. 부모가 워낙 바빴고, 말리카는 평생 그림책 한권 읽어보지 못했다. 문자를 읽고 생각하는 법 자체를 익히지 못한 셈이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이 된 말리카는 그래서 초등학생 때 수업시간 내내 잠을 잤다고 한다. 그렇게 말리카는 하나둘 무언가를 상실한 채 자라나고 있다. 말리카는 이제 러시아어도 한국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무국어’ 상태다.
말리카처럼 부모를 따라 한국에 온 이주배경 아이들에겐 독서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부모가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오면서 갑작스럽게 언어 환경이 바뀐 탓이다. 한국어를 익히는 동안 모국어로 된 책을 읽을 기회마저 잃으면 애초 문해력을 키우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로 된 책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책을 사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최혁수 이주민시민연대 대외전략실장은 “러시아 책 등은 한국에서 구매하면 가격이 한국 책보다 몇배는 비싸다”고 했다.
책을 빌려 보기도 어렵다. 안산시에 사는 몽골 출신 수브드(38)는 한국에서 4살과 2살 딸을 키운다. “스마트폰에만 관심 보이는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싶지만 도서관에선 이 아이들을 위한 책을 빌리기가 쉽지 않다. 실제 한겨레가 이주민 밀집 지역인 안산시 원곡동과 선부동 등의 공공도서관을 둘러보니 아이들을 위한 책은 원서로 마련돼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경기도의 한 이주민 밀집 지역에서 일하는 사서는 “그나마 정부가 지원하는 다문화책이라곤 주로 사회통합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며 “아이들이 그 나이에 누려야 할 재미와 의미에는 관심이 없고 이들을 ‘관리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라고 했다.

고립된 지역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 안성시 대덕면 내리는 아이들에게 ‘섬’과 같은 곳이다. 애초 중앙대 다빈치캠퍼스(옛 안성캠퍼스) 학생들이 자취하던 이곳은 학생들이 떠나간 뒤 외국인이 자리를 잡았다. 값싼 임대료 때문이다. 이 마을에 있는 유일한 초등학교는 전교생 200여명 중 90% 이상이 외국인 아이들인데, 이 지역 역시 애초 원룸촌이었던 탓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책을 읽을 공간은 사실상 전무하다. 더욱이 이곳 가정들은 낮은 임금 때문에 3∼5명이 원룸에서 살아간다. 책을 사 읽기는 더 어렵다.
그간 한국 사회는 이주배경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이처럼 한창나이에 맞는 책을 읽으며 언어 능력 자체를 키워야 하는 시기에 아이들이 글 자체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러면서 모국어와 한국어 모두 익히지 못한 채 자라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현장에서 일부 사서들이 장서를 모으기 위해 노력하지만, 언어와 그 나라 출판 상황에 대한 접근성 문제로 한계가 있다. 포천이주노동자센터 김달성 목사는 “이주배경 아이들은 우리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기본적인 것조차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며 “취약계층인 이들이 받아야 할 지원이 무엇인지 더 세심하게 살펴야 할 때”라고 했다.
글·사진 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