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의 악몽

규혁은 2010년 밴쿠버 올림픽을 앞두고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2007년, 2008년, 2년 연속 스프린트 대회 왕좌를 차지했다. 2009년 대회에서도 1000m 2차 시기 중간 중심을 잃는 실수만 없었다면 3연속 우승이 가능했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5번째 올림픽에 출전하는 그의 나이 32살. 만개한 그의 스케이트 실력이 올림픽 메달로 이어질지 온 국민들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밴쿠버 현지에서도 경기 직전까지 컨디션은 꽤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악연은 질기고도 질겼다. 4년을 갈구한 올림픽이건만 규혁은 500m 경기 전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 올림픽 도전을 앞둔 중압감이 그를 짓눌렀다. 경기 당일에는 얼음판을 고르는 정빙기가 고장이 나 지체됐다. 진행요원들은 30분 뒤 경기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빙기는 돌아갈 줄 몰았다.

2010년 2월13일 캐나다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 빙상장에서 제20회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m 결승에서 9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이규혁이 아쉬워하고 있다. 연합뉴스

몸을 여러 번 덥히면서 맥이 빠져버렸다. 20년 얼음판을 넘나든 규혁도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최악의 사고였다. 이래저래 불운이 겹친 규혁은 1·2차시기 합계 70초48로 15위에 그쳤다. 금메달은 69초82를 기록한 21살의 모태범에게 돌아갔다. 국제대회 제패 경험이 없었던 모태범의 첫 금메달은 올림픽에서였다. 운명의 희비는 그렇게 엇갈렸다.

2010년 2월20일 밴쿠버 하얏트 호텔에 마련된 코리아 하우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올림픽에 대한 소감을 묻자 이규혁이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연합뉴스

모태범은 1000m에서도 은메달을 따냈다. 규혁은 9위에 그쳤다. 그토록 바랐던 올림픽 메달의 꿈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 힘이 빠진 규혁은 빙판에 드러누웠다. 당시 해설위원 자격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제갈성렬도 눈을 질끈 감았다. 규혁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스케이트 타는 걸 지켜봤지만 빙판에 누운 모습은 처음이었다.

밴쿠버는 끝이 아니었다

모든 경기가 다 끝나고 규혁은 관중들이 빠져나간 리치몬드 올림픽 오벌 링크를 터덜터덜 돌았다. 마지막 올림픽의 여운을 이렇게라도 느끼고 싶어서였다.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무너졌다. 규혁에게 올림픽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었다.

올림픽이 끝난 뒤 규혁은 그래도 웃었다. 하지만 억지 웃음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마음엔 깊은 상처가 남았다.

은퇴는 예정된 수순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규혁은 다시 스케이트 끈을 조였다. 1년 단위로 끊어 체력이 허락하는 한 도전하기로 했다. 밴쿠버 올림픽이 끝난 뒤 월드컵 대회에서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규혁은 올림픽 1년 뒤인 2011년 1월, 거짓말같이 스프린트 대회 정상에 올랐다. 4번째 우승이었다. 그의 나이 33살. 용기가 등을 두드렸다. 체력과 기술이 안되면 언제든 포기하겠다며 마음을 비우니 다시 소치올림픽이 눈에 들어왔다.

2010년 2월16일 캐나다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 빙상장에서 제20회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결승에서 이규혁이 역주하고 있다. 이규혁은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으나 500m 결승 당일 정빙기 고장으로 경기가 수 차례 지연되면서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다. 연합뉴스

규혁이 36살에 출전한 2014 소치 겨울올림픽은 그에게 정말 정말 마지막이었다. 밴쿠버 때처럼 500m와 1000m에 출전했다. 규혁은 우승후보가 아닌 여유를 처음 느껴봤다. 2월10일 열린 500m 경기에서는 18위였다. 2월12일, 1000m 경기가 있던 몇 시간 전에 규혁은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규혁의 어머니는 아들의 레이스를 제대로 본 기억이 희미했다. 1996년 하얼빈 겨울 아시안게임 때였다. 이인숙씨는 여자 피겨 총감독 자격으로 두 아들과 함께 대회에 참여했다. 헤이룽장성 실내 링크에서 큰아들의 500m 레이스를 보게 됐다. 규혁은 실력 발휘를 못 하고 6위에 그쳤다. 피겨는 점프 한 번 실수해도 다시 기회가 있지만 100분의 1초를 다투는 스피드 스케이팅은 실수를 한 번이라도 하면 ‘끝’이다.

“내가 봐서 규혁이가 잘 못 탔나….” 괜한 마음이 들어 이인숙씨는 그 다음부터 아들의 경기를 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경기장에 있게 돼도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씨는 이번 소치올림픽 때 18년 만에 아들의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스타트부터 코너링, 스퍼트까지 그는 아들의 마지막 경기 장면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36살의 규혁은 200m까지 스퍼트를 올렸지만 후반부 들어서 속도가 떨어졌다. 막판 직선주로를 달리며 숨이 턱 막히기도 했다. 1분10초04. 40명 중 21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드러누운 규혁의 마지막 레이스는 사람들에게 우승보다 더한 감동을 선사했다. 매번 맘 졸이고 눈물 흘려야 했던 어머니에게도 이번 대회는 ‘행복한 올림픽’이었다.

올림픽이 없었다면 지금의 규혁이 있었을까? 그의 스케이트 인생 자체가 올림픽 금메달을 향한 여정이었다. 아침형 인간, 긍정적 마인드 등 그의 인생 모든 것은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준비되고 계획된 것이었다. 하지만 올림픽이라는 큰 산에서 내려온 지금, 그는 바위처럼 단단하면서도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운 사람이 돼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은 스케이트와 헤어지기 싫은 그의 핑곗거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최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규혁’은 최고로, 그리고 정말로 행복한 스케이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