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세계신기록과 올림픽 좌절

‘국가대표 빙상인 부부의 아들’

어쩌면 이 꼬리표는 규혁이 벗어던지고 싶은 굴레였는지도 모른다. 고등학생이었던 1996년 독일 전지훈련을 떠난 규혁은 부모님께 편지를 보냈다.

규혁이 안고 있을 부담감이, 편지를 든 어머니의 손끝으로 온전히 전해졌다. 그는 이미 막폼으로 달리던 철부지가 아니었다. 그것이 어머니의 가슴을 더 아리게했다.

규혁은 밀려드는 부담 앞에서 멈추지도 주저앉지도 않았다. 규혁이 드디어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역사를 새로 쓰는 ‘사고’를 쳤다. 19살 때였다. 1997년 11월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월드컵 스피드스케이팅 대회 1000m에서 그는 이틀 연속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대한민국 기록 경기 72년 역사상 첫 세계신기록이었다.

규혁의 모험도 주효했다. 이 대회를 앞둔 시점은 스케이트날의 발 뒤꿈치 부분이 스케이트화와 분리가 되는 ‘클랩 스케이트’가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던 때였다. 새로운 스케이트화의 도입 여부를 놓고 빙상계에서도 반신반의 하는 분위기였다. 0.01초를 다투는 단거리 경기에서 새 스케이트를 바꾼다는 건 적잖은 위험부담이 따랐다.

규혁은 과감하게 클랩 스케이트를 선택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 중 유일한 시도였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세계 무대에 ‘이규혁’이라는 이름이 확실히 각인됐다.

이규혁은 1997년 11월6일 캐나다 캘거리에서 스피드 스케이트 남자 1000m 세계기록을 갱신한 뒤 바로 다음날 자신의 기록을 다시 갱신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1997년 11월7일자 <한겨레> 기사.

이제 관심은 자연스레 1998년 나가노 올림픽으로 옮겨갔다. 규혁에겐 2번째 올림픽 도전이었다. 16살 때 첫 출전했던 릴레함메르 올림픽과는 달랐다. 규혁의 기량은 괄목상대, 파죽지세였다. 게다가 세계신기록까지 세운 터였다. 주위의 눈높이는 부쩍 올라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올림픽 직전 열린 스프린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규혁은 컨디션 난조를 보였다. 불길한 징조였을까. 그는 나가노 올림픽 500m에서 8위, 1000m에서 13위에 그쳤다. 규혁은 이 대회를 “가장 후회스러우면서도 다행스런 올림픽”이라고 말했다. 노력이 조금 부족했다는 아쉬움은 후회로 남았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금메달을 땄으면 ‘시건방진’ 운동선수가 될 수도 있었다고 규혁은 회고했다.

불과 석달 전 세계기록 세웠는데… 1998년 2월10일 일본 나가노 엠웨이브 빙상장에서 열린 제18회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경기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한 이규혁이 고개를 떨구고 있다. 연합뉴스

슬럼프, 그러나 다시 일어나다

아쉬움이 워낙 컸던 탓에 나가노 올림픽 뒤 규혁은 짧지않은 슬럼프를 겪었다. 메달 실패의 후유증이 컸다. 주변의 실망스러운 반응보다 자신에 대한 자책이 가슴을 짓눌렀다.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월드컵 레이스에서 B그룹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슬럼프는 끝모르는 늪처럼 규혁의 발목을 계속 잡아당기고 있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규혁은 중대 결심을 하고 태릉선수촌을 나와버렸다. 대표팀에서 삼촌처럼 따르던, 은퇴한 제갈성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제갈성렬은 만류했다. 모든 것이 완비된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하는 것과 밖에 나와 개인훈련을 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럼에도 규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미 마음을 굳히고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둘은 의기투합 했다.

잠실 보조경기장에서 아침 운동을 시작해 강남의 허름한 사우나에서 근력운동을 했다. 롯데월드 빙상장은 사람이 없는 밤 시간에 이용했다. 환경은 열악했지만 훈련은 혹독했다. 규혁은 이를 묵묵히 이겨냈다. 뼈를 깎는 노력의 결과는 금세 나타났다. 2001년 3월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올림픽오발피날레국제대회 1500m에서 1분45초20의 세계신기록을 작성한 것이다. 캘거리 빙상장에는 ‘Lee Kyou-hyuk, New Record’라는 글씨가 새겨졌다.

2002년 솔트레이크에서 열리는 겨울올림픽에 또 관심이 쏠렸다. 팬들의 기대는 다시 올라갔다. 규혁은 현실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컨디션도 정상이었다. 올림픽 때까지 규혁의 1500m 최고기록을 깬 선수도 없었다.

그러나 운명은 얄궂었다. 올림픽의 여신은 규혁이 내민 손을 또다시 뿌리쳤다. 500m, 1000m, 1500m에 출전했지만 각각 5·8·8위에 그쳤다. 월드컵 등 다른 세계대회에서 펄펄 날다가 올림픽에만 나가면 힘을 못썼다. 지독한 징크스였다.

안풀리네… 2002년 2월13일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유타 올림픽오벌 빙상장에서 열린 제19회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결승에서 5위로 메달 획득에 실패한 이규혁이 아쉬워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림픽 실패→전반적인 부진→컨디션 회복→올림픽 실패’가 계속됐다. 규혁은 2002년 12월 국내 스프린트 선수권 대회에서 500m와 1000m를 석권하며 ‘1인자’의 실력을 재확인시켰다. 2003년 열린 겨울 아시안게임에서 2관왕(1000m, 1500m)에 올랐다.

올림픽은 4년마다 찾아오는 빚쟁이처럼 어김없이 돌아왔다. 2006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겨울 올림픽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4번째 올림픽 참가였다. 이번에는, 정말 채무자 신세를 벗어나고 싶었다. 규혁은 올림픽 직전 열린 스프린트 선수권 대회 남자 1000m에서 3위에 올랐다. 여전히 우승후보였다. 그러나 규혁은 토리노 올림픽 1000m에서 1분09초37로 4위에 그쳤다. 3위와 0.05초, 간발의 차이였다. 그는 또 한번 올림픽 징크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 0.05초… 2006년 2월19일 이탈리아 오발링고토에서 열린 제20회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m 결승에서 3위 이강석과 0.05초 차이로 4위를 차지한 이규혁이 기록을 확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림픽, 그 지독한 징크스

4번째 올림픽 노메달의 충격이 컸다. 본인도 은퇴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여전히 상승세였다. 주변에서 은퇴를 말렸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2006~2007 시즌 월드컵 스피드 스케이팅 대회에서 그는 5번이나 1위를 차지했다. 2007년 1월, 노르웨이 하마에서 열린 세계 스프린트 스피드 선수권 대회에서 처음으로 종합 우승도 거머쥐었다. 500m와 1000m 경기 결과를 합산해 순위를 매기는 스프린트 대회는 세계 단거리 스케이터들에게는 꿈의 대회다. 규혁은 2007년에 이어 2008년, 2010년, 2011년 스프린트 대회를 제패했다. 스프린트 대회에서 4번 이상 우승한 선수는 벨라루스의 이고리 젤레조프스키, 미국의 에릭 하이든, 캐나다의 제러미 워더스푼까지 딱 4명밖에 없다. 그만큼 대기록이다.

2008년과 2011년 네덜란드 헤이렌베인에서 열린 스프린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규혁은 말을 타고 트랙을 돌았다. 빙상강국 네덜란드에서 우승자에게 선사하는 특별한 세리머니였다. 작은 체구의 아시아 선수가 말을 타고 링크를 돌 때 네덜란드 관중들은 기립해서 환호를 보냈다. 규혁은 활짝 웃으며 관중들에게 화답했다. 누구도 그가 최고의 자리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2008년 1월20일 네덜란드 헤이렌베인에서 열린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이규혁(가운데)이 캐나다의 제레미 워더스푼 , 대한민국의 문준과 함께 시상대에 서 있다. AP연합

규혁은 오래 전부터 세계적인 선수로 얼음판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2014년 소치 올림픽 남자 500m에서 우승한 미셸 뮬더 선수가 규혁을 우상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규혁은 세계 정상을 여러 차례 정복했지만 지독하게도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올림픽 메달 획득에 거듭 실패하면서도 20여년 동안 그가 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그건 역설적이게도 ‘올림픽’이었다. ‘산이 있어 산에 오른다’는 말과도 같았다.

곁에서 드라마같은 아들의 스케이트 인생을 지켜보면서 애간장을 태웠을 어머니 이인숙씨는 담담하게 얘기했다.

2008년 1월20일 네덜란드 헤이렌베인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이규혁이 꽃마차를 타고 기립박수를 보내는 관중들에게 화답하고 있다. 어머니 이인숙씨는 이 장면을 ‘규혁이가 가장 기뻐했던 순간’이라고 말했다. AP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