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전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에 이어 19일 이용철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삼성의 뇌물 제공 의혹을 제기하자 삼성은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다.
삼성은 김 변호사의 연이은 폭로 사태로 특별 검사 도입에 직면하는 등 난관에 봉착해 있는 가운데 이 전비서관의 추가 의혹 제기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형국으로 확대되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삼성은 이 전비서관의 주장에 대해 일단 "회사 차원에서 그런 일을 지시한 적이 없다"며 "이 전상무와 접촉을 시도중이다"고 밝혔다.
삼성 관계자는 "이 전비서관이 돈을 전달했다고 하는 이경훈 변호사가 삼성전자 상무로 근무하다 2004년에 퇴사해 현재 미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파악됐다"며 "이 전상무에게 사실 관계를 확인해야 진상을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삼성은 사실 확인 여부를 떠나 이 전 비서관의 추가 의혹 제기로 삼성의 부정.비리 폭로 사태가 확산될 뿐 아니라 삼성에 대한 국민 불신이 가중되지 않을까 크게 우려하는 분위기다.
◇ 삼성에 대한 국민 불신 '증폭'되나 =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사태에 이 전비서관까지 가세하자 삼성 고위 관계자들은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역했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이 전비서관의 폭로에 대해 "삼성전자가 그런 일을 한 적은 없다"며 "이 전상무를 상대로 사실을 확인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2004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는데 회사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삼성 관계자들은 또 김 변호사가 제기한 부정.비리 의혹으로 시작된 삼성에 대한 국민 불신이 이 전비서관의 추가 폭로를 계기로 진위파악도 되기 전에 그대로 굳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삼성은 김 변호사가 의혹을 제기했을 때만 해도 "삼성에 법무팀장으로 근무하다 퇴사하면서 생긴 개인 감정으로 인해 근거없는 허위 폭로를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또 김 변호사가 언론인터뷰에서 행한 말바꾸기, 노래방 퇴폐영업 적발 경력, 삼성에 보낸 협박 편지 등을 이유로 김 변호사의 부도덕성을 집중 부각시키며 그의 주장이 허위라고 강력히 반박했었다.
그러나 김 변호사에 이어 이 전비서관이 '금품전달'을 추가로 폭로하자 삼성은 부정.비리 의혹에 대해 섣불리 반박하기 어렵게 됐다.
◇ 삼성 대응 주목 = 삼성은 연이은 뇌물 제공 의혹 제기로 삼성이 비리의 온상인 것처럼 비쳐지고 있는 데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주목된다.
삼성은 김 변호사의 의혹 제기에 대해 "모두 허위 주장이라며 조목조목 반박하는 한편 검찰 수사에 성실히 임함으로써 김 변호사 주장의 허위성을 입증하겠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또 이병철 선대회장 추모식을 대폭 축소하고 이건희 회장이 감기몸살을 이유로 선친 추모식에 불참함으로써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등 극히 신중한 행보를 보여왔다.
이 회장이 19일 추모식에 불참하자 이 전비서관의 추가 의혹제기를 예견한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삼성은 김 변호사의 의혹 폭로 이후 사태의 파장을 우려하면서도 김 변호사 폭로의 허위성을 입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왔으나 이 전비서관의 주장에 대해서는 어떤 답변을 내놓고, 어떻게 대응할지 주목된다.
이 전비서관이 현금 500만원이 든 명절 선물의 사진을 증거물로 제시한 만큼 무조건 부인할 수 없는데다 섣불리 변명하다가는 국민이 납득하지 않고 의혹만 증폭될 것이기 때문이다.
삼성이 회사 차원에서 지시한 적이 없고 이 전상무가 독자적으로 그같은 행동을 했다고 발표해 '도마뱀 꼬리 자르기'를 시도할 경우 국민이 믿어줄지도 의문이다.
◇ 'A급' 위기사태, 장기화 우려 = 삼성은 연이은 폭로로 이번 사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김 변호사, 이 전비서관이 로비 의혹을 잇따라 제기한 데다 정치권이 특별검사 도입을 추진하고 있고 시민단체의 수사 촉구가 빗발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 임직원들은 이에 따라 김 변호사의 폭로에서 비롯된 이번 사태가 심각성 측면에서 과거 그룹에 큰 위기를 가져왔던 안기부 'X파일', 2002년 대선자금 의혹, 이건희 회장의 '베이징 발언' 등과 맞먹는다고 느끼고 있다.
삼성 관계자들은 그룹 전략기획실이 이번 사태의 수습에 매달리는 바람에 내년도 경영계획을 수립하지 못하는 등 이미 경영차질이 가시화되고 있다고 전했다.
삼성은 전략기획실과 계열사들이 상호 조정을 통해 매년 11월말에 새해 경제전망, 투자계획, 실적 목표 등 경영계획을 수립하는데 올해는 김 변호사 폭로 사태로 아직까지 경영계획 검토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 관계자는 "결산, 경영계획 수립, 정기 인사 준비 등으로 기업에 11월은 매우 중요한 시기"라며 "올해는 이 모든 작업이 늦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우려했다.
삼성은 특히 핵심사업인 반도체 부문이 국제시황 악화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일이 터져 이번 사태가 경영전력 분산으로 인한 실적 악화로 연결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고 있다.

현경숙 기자 ksh@yna.co.kr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