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터민 박혜송(27·전남대 법대3년 휴학)씨. 광주평화통일포럼 제공
새터민 박혜송(27·전남대 법대3년 휴학)씨. 광주평화통일포럼 제공

새터민 검사가 탄생할 것인가?
북한 함흥에서 태어나, 1년여의 탈출과정 끝에 2001년 한국에 정착한 대학생이 한국에서 법조인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새터민 박혜송(27·전남대 법대3년 휴학)씨다. 그는 지난 15일 광주평화통일포럼 주최로 열린 포럼에서 ‘혜송이의 대학생활과 법조인의 꿈’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담담한 이야기와 달리 박씨의 실제 대학생활은 간단하지 않았다. 학과 교수에게 교재를 무상으로 ‘배급(~)해달라’고 했던 일, 주관식 시험문제, 남한에서 들었던 북한사회론, 주변 여학생들이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느꼈던 충격 등을 솔직하게 밝혀 공감을 얻었다. 박씨는 다음달 전남대에서 만난 애인과 결혼을 앞두고 있기도 하다.
박씨가 이 포럼에서 발표한 대용을 두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한글 맞춤법에 어긋난 표현들도 더러 있지만, 고치지 않았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1. 선택할 수 있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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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2001년 12월 대한민국에서 자유의 몸으로 다시 태여난 박혜송입니다. 오늘 이렇게 귀한 자리에서 여러분들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2000년 제가 태여난 함흥을 떠나 10개월간의 중국 체류와 1개월의 태국 주재를 거쳐 2001년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저를 놀래운 것은 거대한 공항의 크기였고 발밑에서 나를 비추는 보석같은 거울이였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북한과 다름없는 산과 들이였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밖을 내다볼 때는 그리운 내고향 산과 들을 보는것 같아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석달간의 조사와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나온 순간부터, 제 머리에는 내가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가? 나의 미래를 위해 과연 무엇부터 하여야 할가? 나의 희망은 무엇인가? 라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하면서도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나의 미래를 위해서 내가 뭔가를 고민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제일 큰 행복이였고, 저의 앞날을 위해서 뭔가를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두 번째였던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검사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동기는 단순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제가 흘려야 하는 노력의 대가는 엄청난 것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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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검사의 꿈을 키워왔던 것은 고향에 있을 때부터였습니다. 어렸을 때였는데 제가 살던 집 위층에 검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엄마가 장사를 하셔서 힘들게 돈을 버셨지만, 그 집은 검사라는 직위 덕분에 매일같이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오가는 사람들 손은 빈 손이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검사라는 직업이 한없이 부러웠고, 나도 꼭 검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워왔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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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떻게 하면 검사가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되여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검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대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북한에서는 대학을 졸업하면 거기에 맡는 직업이 맡겨졌기 때문에 처음에 대학으로의 결정은 그러한 판단에 따른 것이였습니다. 처음 제가 집을 받은 곳은 수원이였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아주대와 또 제가 한국으로 올 수 있게 도와준 지인이 살고있는 전남대를 선택하여 시험을 보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행복한 고민이 또 시작되였습니다. 두 개 대학에 모두 합격! 어디로 가야 하지? 고민은 되였지만 행복했습니다. 그때 제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교수님이셨습니다. 면접을 볼 때 딱딱하게 사무적인 질문만 하셨던 아주대 교수님들과는 달리 전남대 교수님들은 법대로 오려면 꼭 전남대 법대로 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고, 또 제 마음은 전남대로 끌렸습니다. 그러한 인연으로 선택하게 된 전남대는 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였습니다. 제가 대학으로, 그것도 법대를 선택했을 때, 옆에서 저를 도와주시던 많은 분들이 만류하셨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보다는 먼저 돈을 버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첫째라고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또 꼭 가려면 제가 중국어를 잘하니 중문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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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3법이라는 말도 처음 듣는 제가 법대로 가서 잘 할수 있을가 걱정이 되였지만, 그래도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라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저를 만류하시는 그분들에게 1년만 먼저 공부를 해볼 거라고, 그래서 정말 잘 못하고, 제 적성에 맞지 않으면, 그때 중문과로 전과를 하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이렇게 저와 전남대와의 인연이, 또 광주와의 인연이 시작되였고, 저는 2003년 2월 광주로 이사오게 되었습니다.

2. 대학생활의 시작

(1) 수강신청

대학생활의 시작은 순탄지 않았습니다. 먼저 애로는 수강신청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수강신청이 따로 없고, 중대, 소대 단위로 구성된 학급이 학교에서 짜여진 시간표대로 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수강신청이라는 말 자체가 저에게는 생소했습니다. 거기에 4개이상 영역에 해당되는 교양수업을 들어야 한다니?? 도대체 뭔 말이지?? 일단은 선배들이 수강신청을 해주는 대로 듣고, 수강정정기간에 다시 수강신청을 하기로 했습니다. 법대는 1학년 1학기부터 전공수업이 시작되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법전과 교과서가 왜 따로 있고, 왜 이렇게 두꺼운지, 책은 어디에서 사야 하는지? 또 담임은 왜 없지? 수업은 어디에서 듣지? 모르는 것 투성이였습니다. 학생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학교는 왜 이리 큰지...꼭 미로에 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2) 교과서 주세요.

어디에서 어떤 것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던 저는 드디어 법대 학과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과실도 1,2로 나늬어 어디로 들어갈지, 한참을 망설이다 그래도 2보다는 1이 낫겠다 싶어 1학과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똑똑똑…’ “! 네…” (여자목소리)

저는 문을 살포시 열고 들어갔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저기…교과서 받으러 왔는데요...”

“무슨 교과서요?”

“수업을 받으려면 교과서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교과서 가지러…”

“뭔 교과서???”

다시 용기를 내어. “저 여기서 책을 안주나요?”

“학생, 여긴 학과실이에요. 책을 왜 여기서 줘요?”

“그럼 책은 어디서 줘요?”

“뭔 책을 과실에서 줘요? 책이야 본인이 서점에서 사야죠.”

“네? 그럼 어떤책을 사야하죠?”

“거야 교수님이 정해주신 책으로 본인이 서점에서 사야죠…”

“네…제가 잘 몰라서…죄송합니다.”

뒤통수에 꽂히는 이상한 눈초리를 피해 저는 황급히 조교실을 빠져나왔습니다. 아~한국에서는 본인이 책을 사야 하는구나. 그런데 교수님이 교과서로 하는 책은 어떻게 알지? 정말 막막, 답답 그 자체였습니다. 이렇게 저의 황당한 1학년 첫날이 시작되였습니다.

(다음 회: “문제가 달랑 한줄? 북한과 딴판인 시험지 받곤 캄캄”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