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요판] 뉴스분석 왜? / ‘특권’ 논란 서영교 의원
서영교(51·서울 중랑갑)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남들이 운동권 출신이라는 사실을 감출 때 오히려 이를 자긍심으로 삼는다. 민생 입법에 앞장섰으며, 대여 공격수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가 마이크를 잡거나 단상에 오르면 정부 쪽 인사들이나 여당 사람들은 긴장했다. 야당 의원으로서 성장 잠재력이 큰 정치인 중 한명으로 꼽혔다. 그런 그가 특권 정치인의 상징으로 하루아침에 전락했다. 정치인 서영교는 어떤 인물이며, 그에게 무엇이 잘못됐을까.
“빛이 안 보여요. 요즈음 잠도 못 자고, 너무 괴로워서 죽을 것 같아요.”
가족 채용 문제로 칩거하던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지난 28일 간신히 전화 통화를 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모기처럼 작고 힘이 없었다. 씩씩하고 당차던 평소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더불어민주당 당무감사원은 지난 30일 “엄중 중징계가 필요하다고 만장일치 결론”을 내리고, 서 의원 문제를 당 윤리심판원에 넘겼다. 서 의원은 19대 국회 때 남동생을 5급 비서관(운전기사), 딸을 인턴, 친오빠를 후원회 회계책임자로 고용했던 사실이 최근 드러난 바 있다. 서 의원은 당무감사원 발표 직전 기자회견을 열어 “사려 깊지 못했다. 다 저의 불찰이었다”고 사과한 뒤 “저로 인해 상처 입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올해 세비는 공익적 부분에 기탁하겠다”고 몸을 낮췄다.
하지만 현재 분위기로는 서 의원이 자진 출당하지 않을 경우 윤리심판원 역시 제명이나 당원권 정지 등 중징계 처분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상처가 불가피하다. 이미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어서다. 서 의원 사건 이후에 친인척을 보좌진으로 채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 다른 여야 의원 10여명이 해당 보좌진을 면직 처리한 뒤 사과하는 선에서 마무리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서 의원은 지난 20일 <티브이(TV)조선>에서 딸을 인턴으로 데리고 있었다는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는 장래가 촉망되던 야당의 젊은 정치인 중 한명이었다. ‘86세대’의 대표 주자 가운데 한명인 그는 이번 총선에서 공천 탈락의 위기가 있었지만, 여봐란듯이 서울 중랑갑에서 큰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여세를 몰아 곧 있을 서울시당위원장 선거에 도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2년 연속 ‘국정감사 우수의원’ 선정
시원시원한 목소리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여장부 스타일의 그는 의정활동에서도 늘 높은 점수를 받았다. 2014년과 2015년 2년 연속으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엔지오(NGO)모니터단이 각각 선정한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뽑혔다. 법제사법위원회 동료였던 정의당의 서기호 전 의원은 “법조인이 아니지만 법률 지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며 “질문은 날카로웠고 내용은 정의로웠다”고 평했다. 인접 사무실의 한 비서관은 “서 의원이 보좌진한테 일을 빡세게 시켰다”며 “의정보고서 등을 만들 때 그 방 사람들은 밥도 느긋하게 먹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 의원은 그동안 사회적으로 중요한 법을 많이 만들었다. 지난해 7월 국회에서 통과된,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의 일명 ‘태완이법’이 대표적이다.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에서 태완이 사건을 접한 뒤 법 개정에 앞장섰다. “작년(2014년)에 시사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태완이 얘기가 나오더라. 많이 울다가 ‘저 불쌍한 어머니와 태완이는 어떡하지? 나는 아줌마이면서 국회의원이기도 하잖아. 그래, 내가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2015년 8월13일 더팩트 인터뷰) 대구에 살던 6살 김태완군은 1999년 동네 길에서 황산 테러를 당해 49일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뒤 김군 부모는 15년 이상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학생운동뒤 10년간 지역활동 최상급 스펙에 장래 촉망 의정활동 동료들도 호평 살인죄 공소시효 없앤 ‘태완이법’ 만드는 데 앞장 날카로운 대여 공격수로 ‘사이다 의원’ 별칭 얻기도 자신에게 관대한 잣대로 딸 인턴 채용 등 비난 자초 “지나치게 고압적” 평가도서 의원은 갑의 횡포에 맞서 을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권리를 지키기 위해 더민주당이 만든 당내 ‘을지로위원회’에서도 열심히 활동했다. 일명 ‘ 피에타 3 법 ’으로 불리는 이자제한법 , 대부업법 , 불법채권추심방지법안 등 주요 서민법안들도 대표 발의했다. 대여 공격수로도 이름을 떨쳤다. 지난해 6월 황교안 국무총리를 상대로 한 대정부질문에선 메르스 사태에 대한 정부의 무능을 조목조목 질타해 ‘사이다 의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때 대정부질문 동영상은 조회수만 100만을 넘었을 정도로 화제를 불러모았다.
그는 정치권 이전의 경력도 최상급이다. 학생운동과 풀뿌리 지역활동 경험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이화여대 정외과 83학번인 서 의원은 처음에는 학생운동과 거리가 멀었다. 고교(혜원여고) 때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일찍부터 리더십을 보였지만, 대학 1학년 때는 미팅과 고고장을 즐기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대학 2학년 때 교내시위 현장을 지나다가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던 선배가 사복경찰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장면을 보고, 그를 구출하려는 학우들의 몸싸움에 자신도 모르게 끼어들면서 인생의 행로가 바뀌었다. 그 뒤 학생운동에 뛰어든 그는 4학년 때 총학생회장을 맡아 대규모 수업거부 집회(86년 4월)를 이끄는 등 이화여대의 전설적인 투사가 됐다. 그는 학생운동 경험에 대해 “내 인생에서 가장 두렵고 힘든 결정이자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내 인생에서 가장 인간답고 행복한 시기였으며 이때 마음속 깊이 담은 자긍심은 아직도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서영교의 희망 만들기> 2012년)고 밝혔다.
어머니가 키운 정치인
건국대 사태(1986년 10월)와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던 그는 졸업 후 1988년 자신이 어릴 때부터 자랐던 서울 중랑구 면목동으로 돌아갔다. 노동운동을 위해 공단 등으로 가던 당시 운동권 인사들과는 다른 길이었다. 서 의원은 기자에게 “저는 학생운동을 했지만 조직적이지 않고 감성적이었다. 동료들이 조직적으로 노동현장을 갈 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고민했다. 그 결과 살아온 동네에서 책 읽기를 돕는 것이 나한테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동네에서 처음 했던 일은 무료도서대여실 운영이었다. 지역신문(면목신문)에 칼럼을 기고해 같이 일할 사람들을 구한 뒤 이들과 함께 출판사들을 찾아다니며 책을 기부받았다. 면목우체국 앞에 자리잡았던 ‘푸른소나무 무료도서대여실’에는 각종 독서모임이 자연스레 꾸려졌다. 이곳 출신들이 자신의 회사에서 노조를 결성하기도 하는 등 무료도서대여실은 지역운동의 거점이 됐다. 동네별 작은 도서관이 없던 시절 면목동 무료도서대여실은 난곡 등 다른 지역의 모델이 됐다. 도서대여실 사업이 자리를 잡은 뒤에는 배움을 갈망하는 어머니들을 위한 주부대학을 열어서 운영했다.
10년 이상 지역의 청년 활동가로 일한 그는 1999년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무리 훌륭한 이상향도 구체적인 정치적·법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결코 현실화되기 어렵다”(<서영교의 희망 만들기>)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에서 부장과 부국장을 거쳐 부대변인을 지내는 등 정당 경험을 쌓았다. 노무현 정부 후반기엔 청와대 춘추관장 겸 보도지원비서관을 맡기도 했다.
학생운동 주역, 10여년의 지역활동가, 10여년의 정당 경험 등 나름 준비된 정치인이었던 서영교를 국회의원으로 만든 사람은 어머니 이영자(2013년 작고)씨였다. 이씨야말로 생활력 강한 여장부였다. 자식들 교육을 위해 직장이 지방인 남편을 두고 홀로 5남1녀의 자녀를 이끌고 고향(경북 상주)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서 의원이 여섯살 때였다. 면목동에서 40년 넘게 옷가게를 하면서 자녀들을 뒷바라지했다. 딸이 학생운동으로 구속됐을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면회를 다녔는데 운동을 그만두라고 하기는커녕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딸이 출마를 머뭇거릴 때 “내가 지금껏 여기서 장사하면서 누구와 한번 싸우지도 않았다. 이 가게에서 콩나물 천원어치를 사면 저 가게에서는 시금치 천원, 또 다른 가게에서는 파 천원어치를 샀다. 두루두루 잘 지내려고. 너 정치시키려고 40년을 기다렸는데 내 말을 안 듣니? 내가 죽고 나면 그때 후회할 것이다”라고 다그쳤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만난 남편 장유식(52) 변호사도 출마를 권했다.
가족의 힘은 거기까지여야 했다. 그러나 뱃속에 든 아이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노스님의 ‘예언’대로 딸을 정치인으로 키우고 싶었던 어머니는 형제들에게 “영교를 도와라”고 지시했다. 이에 당시 횟집을 운영하던 막내 남동생은 가게를 접고 운전을 맡았다. 체육계열 교수로 있던 오빠는 후원회 회계책임자가 됐다. “원래 회계책임자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로 돼 있었는데 선관위에 등록하는 날에 그 사람이 당내 다른 경쟁 후보 쪽으로 갔다는 것을 알았다. 할 수 없어서 오빠가 맡았다. 오빠는 나를 위해 돈을 안 받아 갔는데 선관위에서 회계책임자는 유급이라고 해서 최저선인 월 90만원을 받았다. 매년 300만원을 후원금으로 다시 넣었다”고 서 의원은 말했다.
“공사구분 못하는 면이 있어”
2014년에 딸을 인턴으로 채용한 일에 대해 서 의원은 “딸이 컴퓨터를 잘 다루는데다가 마침 인턴 자리가 비어 있어 휴학중인 딸을 사무실로 나오라고 했다”고 하지만, 이 건은 다른 것보다 더 고약하다.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의원실 인턴이라는 좋은 스펙을 쌓은 딸은 그 뒤에 로스쿨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보좌관에게 연 한도인 500만원의 후원금을 받은 사실이나 변호사 남편을 의원들과 피감기관의 저녁 자리에 부른 것도 불법 여부와 관계없이 국민 눈높이에서는 납득하기 어렵다.
늘 당당하고 목소리를 높였던 86세대 정치인이 왜 이러한 도덕적 수렁에 빠지게 된 것일까.
더민주당의 수도권 한 중진의원은 “정치인은 늘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서 의원은 자기 중심적이고,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문화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며 “30대에 청와대 춘추관장을 지내고, 40대 초반에 서울시당 중앙위원에 깜짝 당선되는 등 정치적으로 너무 일찍 출세하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또다른 야당 소장파 의원은 “18대 국회부터 가족 채용이나 보좌관 후원금 등은 지탄의 대상이 됐다는 점에 비추면 서 의원의 행동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며 “공사 구분을 잘 못하고 성찰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밝혔다.
운동권 출신이 갖기 쉬운 선민의식 때문에 자기한테는 관대한 잣대를 적용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오랫동안 국회를 지켜봐왔던 한 고참 보좌관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해가 되는 구석도 없지 않다. 보좌관 후원금만 하더라도 현금으로 받아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질 나쁜 의원들에 비하면 얌전하다”며 “그런 것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정치인의 태도인 것 같다. 서 의원은 공무원 등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지나치게 고압적으로 굴 때가 많았다. ‘내가 옳고 당신은 틀렸다’는 생각이 강하다 보니 자기 문제를 객관화하지 못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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