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했다. 야권에 그만한 경세가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21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국회 교섭단체대표 연설 직후 기자와 만난 천정배 국민의당 공동대표는 “근래 연설 가운데 가장 좋았다. 텍스트를 출력해 밑줄을 그어가며 들었을 정도”라고 했다. 김 대표의 이력과 보수적 안보관에 비판적인 경쟁 정당의 대표였지만, 연설에 담긴 김 대표의 경제 철학과 통찰에 대해선 극찬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몇몇 새누리당 의원들도 관심을 나타냈다. 더민주 관계자는 “김세연 의원실 등에서 ‘텍스트를 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고 전했다.
김 대표의 연설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경제민주화를 통해 포용적 성장으로 나아가자”는 것으로, 김 대표가 말하는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재벌 개혁’이다. 김 대표는 연설에서 “국회가 거대경제세력(재벌)을 대변하면 대한민국에는 희망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재벌개혁을 위해 당장 시행해야 할 과제로 △재벌총수 전횡 방지를 위한 상법 개정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 근절을 위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 폐지를 꼽았다. 올해 정기국회의 중점 과제로 추진하겠다는 뜻이다.
더민주 경제민주화 티에프(TF) 팀장인 최운열 의원은 “8월말까지 상법과 공정거래법의 개정안을 마련해 정기국회 전 발의할 계획”이라며 “현재 티에프에서 법안의 구체적 개정 방향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상법 개정의 내용으로는 △소액주주의 독립적 사외이사 선임 시스템 도입 △집중투표제와 전자투표제의 단계적 실시 △다중대표소송 도입 등이 꼽힌다. 현재 더민주가 마련 중인 상법 개정안은 지난 2013년 7월 법무부가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을 반영해 입법예고까지 했으나, 청와대와 10대그룹 총수의 간담회 직후 사장된 상법 개정안과 뼈대가 같은 것으로 알려진다.
공정거래법 개정은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에 대한 고발권을 공정위에 독점적으로 부여한 조항을 삭제해 누구라도 위법행위를 고발할 수 있게 만드는 게 핵심이다. 김 대표는 이를 두고 “한국경제에 일상화된 독점의 폐해에 손을 대겠다는 국민적 의지의 상징이며, 실제로 큰 효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연설에서 밝혔다.
김 대표의 이날 연설이 당의 대선전략과도 연동돼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 점은 김 대표가 “경제민주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는 대통령 후보를 선출해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언급한 대목에서도 확인된다. 최운열 의원은 “내년 대선을 경제민주화 이슈로 치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특히 경제민주화를 ‘포용적 성장’이라는 성장 전략과 연계시켰다. 그는 이날 “경제민주화가 곧 경제활성화”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경제 활성화’를 명분으로 경제민주화 약속을 파기한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다. 김 대표는 이날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새누리당이 말하는 경제민주화도 내가 다 만든 것 아니냐. 만들어놓고 지키지 않는 게 그 당의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런 김 대표의 성장론은 ‘경제민주화→격차해소→소득증대→내수활성화→경제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전제한다. 김 대표가 이 과정에서 최근 북미와 유럽에서 논의 중인 ‘기본소득’을 언급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김 대표는 “얼마전 월 300만원의 기본소득 지급과 관련한 스위스 국민투표가 부결됐지만, 초기 논의 단계에서 23%의 국민이 기본소득 도입에 찬성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세계적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더민주의 한 초선 의원은 “급진 좌파의 아이디어로 알려진 기본소득을 ‘안보 우파’인 김 대표가 언급하는 것을 두고 놀랐다”고 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21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연설을 마친 뒤 걸어나오며 의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21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연설을 마친 뒤 걸어나오며 의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