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한글은 어쩌면 공기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늘 가까이 있어서 소중한 줄 모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해마다 돌아오는 한글날이 되면 우리는 한글의 우수성을 찬양하고 오늘날의 언어 실태에 대해서 반성을 하면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뒀던 고마움과 미안함을 조금씩 풀어내고는 합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글날이 가까워지자 언론에서는 지자체의 선전문구나 거리의 간판이 ‘영어’로 범벅되어 ‘한글’을 홀대한다고 지적했으며, 누리꾼 사이에서도 ‘외계어’나 다름없는 통신언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한자어에 밀려 고유어가 설 자리를 잃게 된 현실을 개탄한 이천만씨의 글 ‘한글은 토씨만 남을 것인가’(<한겨레> 10월22일치)도 그와 같은 목소리와 맥을 같이하고 있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에 이렇게 글을 씁니다.
첫째, 이천만씨는 문자인 ‘한글’과 언어인 ‘한국어’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수입했으면 좋겠지만 자기들의 언어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가 한글이었기에 세계 공용어 영어를 제치고 한글을 수입했다’라는 문장을 보면 문자인 ‘알파벳’과 언어인 ‘영어’의 개념도 서로 뒤섞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문장만 보면 찌아찌아족이 받아들이려고 한 것이 영어인 것 같기도 하고 알파벳 같기도 하고 한글 같기도 합니다. 물론 한국어와 한글은 서로 맞닿을 적이 많기에 평소에 잘 의식하지는 않지만, 둘은 엄격히 구별해야만 합니다. 한국어가 공용어가 될 수는 있어도 한글이 공용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이천만씨는 ‘유엔 세계문화유산에서는 한글이 유일하게 문자유산으로 채택되었다’라고 하셨는데, 세계문화유산을 지정하는 곳은 유엔 산하의 유네스코입니다. 또한 한글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채택된 일은 없습니다.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문자인 한글(또는 훈민정음)이 아닌 한글의 창제 원리를 설명한 책인 <훈민정음>입니다. 유네스코는 기록물인 <훈민정음>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지 문자인 한글의 가치를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셋째, 이천만씨는 ‘겹자음이 많은 언어들을 문자로 표현하는 데 지구상에서 한글을 따를 문자가 없다’며 영어의 의성어 표현의 한계나 일본인의 영어 발음의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자를 쓰더라도 닭 울음소리와 같은 물리적 소리는 똑같이 적을 수 없습니다. 영어 화자가 닭 울음소리를 ‘cock-a-doodle-doo’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게 적을 뿐이지 알파벳의 문제 때문에 그렇게 적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영어 문장을 가나로 적든 한글로 적든 원어의 발음과는 거리가 먼 어떤 소리가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어의 발음 문제는 문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모국어의 음운 체계에 따른 것이지요.
이를테면, ‘ㄹ’의 경우 탄설음 [r]와 설측음 [l]을 모두 아우르는 문자입니다. ‘ㄱ’도 초성에 오느냐 종성에 오느냐 유성음 사이에 오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음성이지만 문자만 봐서는 이런 차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를 발음하면서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별하는 것만 놓고 본다면 일본어 화자가 한국어 화자보다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찌아찌아족이 그네의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로 한글을 선택한 것은 알파벳과는 다른 특성이 있는 한글의 장점을 높이 산 까닭도 있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국의 경제적 지원을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글이 문자의 역사에서 음운 문자에서 자질 문자로 나아간 획기적인 문자임은 틀림없습니다만, 가끔 잘못된 사실에 기초해서 한글을 지나치게 드높이는 것을 볼 때면 민망한 마음이 들고는 합니다. 물론 제가 지적한 것들은 이천만씨 혼자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언론도 한글과 한국어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해마다 한글을 ‘홀대’한 것에 대해 반성해도 제대로 고쳐지지 않는 것은 한글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걸까요?
전정현 서울 강서구 화곡동
[한겨레를읽고] 한글과 한국어, 구분해서 사랑하자 / 전정현
이천만씨 글 ‘한글은 토씨만 남을 것인가’에 대한 반론
- 수정 2009-11-08 17:54
- 등록 2009-11-08 1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