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 이름을 본뜬 ‘뉴욕 타임스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뉴스페이퍼 테스트’라는 말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 다음날 아침 <뉴욕 타임스>(또는 어느 신문이건) 1면에 보도되어도 떳떳한지 생각해보고,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면 그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에는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가 언론에 의해 검증받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언론과 언론인에 대해 기본적인 신뢰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선진국의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뉴스페이퍼 테스트’가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신문에 날까 두려운 일이라면 ‘하지 말라’가 아니라, ‘무슨 짓이든 하되, 절대로 신문에 나지 않아야 하고, 만일 신문에 나면 철저히 부인하면서, 허위보도라고 우겨라’가 될 것이다. 최근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한국판 뉴스페이퍼 테스트의 주인공은 정부나 일반 기업이 아니라 언론기관의 핵심 간부라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한국의 2대 공영방송의 한 축을 이루는 <문화방송>의 백종문 미래전략본부장이 그 사람이다.
지난 2012년 파업 도중 문화방송에서 해고된 최승호 피디와 박성제 기자에 대해 그가 “증거가 없는 것을 알고도, 가만 놔두면 안 되겠다 싶어 해고했다”고 말한 사실이 최근 <한겨레> 등의 보도로 확인된 것이다. 백 본부장은 물론 자신의 문제 발언이 녹음됨으로써 훗날 ‘신문에 보도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의 해고를 결정할 당시 인사위원이었던 그가 해고의 정당성과 적법성을 스스로 부인함으로써, 그 자신은 물론 그가 몸담고 있는 문화방송에 치명상을 입혔다.
언론기관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과 책임의식이 있다면, 문화방송 이사회와 안광한 사장은 다음 두 수습책 중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백 본부장을 근거 없는 헛소리를 한 ‘정신병자’ 수준으로 치부하면서 해임하거나, 아니면 저질러진 불법 해고를 스스로 취소하고 인사위원장이었던 안 사장 자신을 비롯한 당시 인사위원 전원이 사퇴하는 길이다. 하지만 문화방송은 어느 쪽도 아닌 제3의 길을 선택했다. 문화방송은 지난달 26일과 29일 발표한 공식입장을 통해 ‘선거철 정치공작’, ‘명백한 허위보도’ 등의 상투적 표현을 동원하여 한겨레에 문제 발언의 녹음파일을 제공한 최민희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한겨레를 공격함으로써 전형적인 한국판 ‘뉴스페이퍼 테스트’를 완성시켰다.
문화방송은 한겨레가 녹음된 대화 내용을 임의로 편집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둘은, 왜냐면 증거가 없어 (…) 그런데 이놈을 가만 놔두면 안 되겠다 싶어 해고를 시킨 거예요”라는 내용은 그대로 육성으로 녹음되어 있다. 특히 “좌파 인사가 좌파 신문에 단독이라고 기삿거리 하나를 던져 주면 이 신문은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대서특필” 운운하는 원색적·감정적 표현에 이르면 이 방송이 한때 공영방송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바로 그 방송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언론 보도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있다. “신문에 났다”는 말은 논쟁에서 이길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사가 자신의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은 다른 기관과는 달라야 옳다. 그럼에도 이치에 맞지 않는 억지를 부리는 문화방송 경영진의 고집은 어디서 온 것일까? 최고 권력자의 신임만 잃지 않으면 된다는 자신감에서 오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경영진의 바로 그 터무니없는 고집과 자신감이 언론기관 문화방송의 토대를 허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