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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언어 현실이 아이티(IT)업계 생리를 닮아가고 있다. 1, 2등이 모든 걸 장악한다. 3등 이하는 틈새 생존을 꾀할 수밖에 없다. 한국어는 그래도 생존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사용인구가 7, 8천만에 달하고 고유 글자가 있으며, 교육 수준도 높다. 그런데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그건 상층 지배그룹이 우리의 언어를 갈고닦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나쁜 전통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세종의 한글 창제 이래 지배층이 그것을 갈고닦아 새로운 것을 만든 게 없다. 전부 한문에 매달렸다. 추사체가 뛰어나지만, 추사가 한글 폰트를 몇 개만 남겼어도 한글이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퇴계나 율곡, 다산, 또는 역대 왕 중에 몇이라도 한글로 된 멋진 문헌을 남겼다면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세계문자축제 준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유재원(63) 한국외국어대 교수(그리스어과)는 한국 지배층의 한글 경시가 이젠 영어 편중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준비위 공동위원장을 맡은 임옥상(63) 화백과 함께 7일 <한겨레>를 찾아온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우리는 이제까지 주로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만 얘기해왔다. 물론 한글은 매우 우수하다. 한자가 토기라면 거기에 유약을 좀 바른 게 일본 가나고, 서양 알파벳은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간 자기에 해당한다. 거기에 비하면 한글은 최상의 질을 자랑하는 도자기다. 하지만 거기에 담을 내용이 없다. 토기 한자에는 담을 게 무궁무진하고, 영어도 그에 못지않다. 일본의 가나도 담고 있는 정보량이나 정보수준은 한글보다 1000배 이상 많을 것이다. 이들 중 어느 언어가 살아남겠나? 지식을 체계화하고 차원을 높여가는 고급 학술언어를 많이 내장한 언어가 살아남는다. 한글이 살아남으려면 학문어가 돼야 한다.”

인도의 언어들이 그 방대한 사용인구에도 불구하고 영어에 눌려 사멸해가고, 인구가 얼마 되지 않는 그리스·로마어가 지금까지 유력 언어로 살아남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어나 독일어, 스칸디나비아어가 영어에 잠식돼 가고 있으며, 생존율이 높다는 프랑스어마저 최근 영어 확산에 따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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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자축제 구상을 처음 제안한 임옥상 화백은 “그런 언어 현실을 바라보고 해법을 찾고자 한다. 이 축제를 통해 한글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문자를 다시 보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세계의 주요 언어 전문가들을 두루 초청해 내년 11월 제1회 세계문자축제를 서울에서 열 계획이다.

유 “역대 정권들 영어 편중 정책 우리 말·글 지키는 장벽 허물어” 임 “제2의 한글 창제 노력 필요” 글자체 개발·폰트 다양화도 제안 내년 언어전문가 초청 축제 계획

임 화백은 정세균, 주호영, 김현미 의원 등과 준비위원회를 꾸려 이 행사를 국가 차원에서 격년제로 정례화하는 방안을 구체화해왔다. “첫 대회는 세계 문자의 기원과 죽살이(생사)를 살펴보고 문자의 문화적 의미를 살필 생각이다.” 이를 위해 지난 6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이 모여 간담회를 열었다. 임 화백은 “문자의 다양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비패권 언어들끼리의 연대가 필요하다”며 세계문자연구소와 학회 설립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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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학술행사를 총괄하게 될 유 교수도 “수많은 언어가 생사의 기로에 내몰리고 있다. 언어가 사라지면 그 언어를 담고 있던 문명 전체가 사라진다. 언어가 사느냐 죽느냐는 지금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렸다”며 국제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 일본이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게 그나마 정말 다행”이라며 “영어 익히기가 쉽지 않다는 게 영어 패권으로부터 우리말과 글자를 지켜내는 최강의 장벽이 되고 있다는 건 역설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역대 정권의 영어 편중 언어정책은 그나마 있던 이 자연 장벽을 줄기차게 허물어뜨리는 것이었다”며 “그것은 문자를 도구, 수단으로만 여기는 사고방식 때문이다. 문자는 문화의 본질이요 생명이다. 문자를 포기하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문명사적 대변혁기인 인터넷 시대에 역설적으로 문자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세계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살피고 대책을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어를 학문언어로 만들기 위한 일본의 노력은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고 덧붙였다.

임 화백은 사람마다 자기만의 글씨체를 갖는 육필운동이 한글 살리기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 영어처럼 아름다운 글자체 개발, 폰트의 다양화를 적극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의 한글 창제 원리를 다시 살피고 그 초심으로 돌아가는 제2의 한글 창제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 경제가 세계 10위권이라는데,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문화를 창출해야 한다. 한글은 구슬인데,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아닌가. 좋은 한글책의 외국어 번역을 국가가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빈약한 한글 위키피디아 내용을 채우기 위한 국가지원기구 같은 것도 만들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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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