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업이든 부업이든 시를 업으로 삼는 분들에게는 외람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요즘 시대에 시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광고계로 가는 게 아닐까라고. 한때 시는 ‘마음을 병석에서 일으켜 세워줄’ 최후의 보루였다. 지금은 적잖은 사람들이 ‘시의 죽음을 애도’한다. 시를 읽는 사람이 줄고 자연히 쓰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나와 타인’, ‘나와 세상’, 그리고 ‘나와 나 자신’을 엮어줄 가장 깊은 고리가 사라지고 있다.
어떤 독자는 티브이면에 웬 시 타령이냐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스마트폰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시집 애플리케이션(응용 프로그램)을 통해 10만명 이상의 독자를 확보한 시집이 있다면 눈여겨볼 만하지 않겠나. 이 시집에는 작가 소개란(사진)에 ‘작가’ 본인 사진과 더불어 ‘소’와 ‘개’ 사진이 있고, 목차란에는 누군가 자신의 ‘목’을 발로 ‘차’는 사진이 있다. 시집 제목은 <서울 시>. 세간에는 애니팡 시인, 에스엔에스(SNS) 시인이라고 알려진 하상욱이 그 주인공이다.
‘알콩달콩/ 좋아보여// 재밌게도/ 사는구나’(하상욱 단편시집 ‘옆 사람 카톡’ 중에서)
‘서로가/ 소홀했는데// 덕분에/ 소식듣게돼’(하상욱 단편시집 ‘애니팡’ 중에서)
여러모로 재밌지 않은가. 일단 짧다. 리듬감도 있다. 그저 소소한 이야긴가 싶더니 맨 마지막에 배치된 제목을 보고선 ‘빵’ 터진다. 그러고선 ‘맞아 맞아’ 하며 고개가 끄덕여진다. 처음에는 그저 웃기 위해 클릭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의미심장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의 시에 대한 미학적 평가가 혹독할 수는 있겠으나 수많은 독자들을 엮어내는 위력을 보노라면 색다른 평가도 나올 법하다. 보들레르가 당대의 어느 크로키 화가를 ‘현대적 삶의 화가’로 평한 적이 있는데, 어쩌면 하상욱은 ‘현대적 삶의 시인’이 아닐까.
우선 그를 시인이라 부를 수 있는지 애매하다는 점부터 주목해보자. 그는 등단한 시인이 아니다. 아마추어이고 제도권 밖에 있는 사람이다. 형식적으로도 그의 시는 하나의 시각디자인 형태를 띠고 있고 제목은 ‘하상욱 단편시집 ○○○ 중에서’ 같은 식으로 글 말미에나 제시된다.(물론 실제 시집은 없다.) 기존 작법으로 보자면 사실상 제목 없는 시에 가깝다. 행렬을 맞추기 위해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것도 다반사다. 정서적으로도 진정성이나 깊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호흡은 최대한 짧게 가져가서 지루함을 악덕으로, 재미를 미덕으로 삼는다.
그런 점에서, 하상욱의 시가 지닌 문학적 가치는 몰라도 그에 대한 대중적 소비만큼은 하나의 사회문화적 현상임이 분명하다. (죽어가던) 시를 ‘민간화’하는 데 비교적 성공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문학적 소양과 무관하게 비주류가 시를 쓰고, 회화적 전회(pictorial turn)가 우세한 시대에 시각적 정서를 결합하며, 유희를 통해 시를 대중적으로 유통시키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 유희도 현대적 삶을 소재로 한 블랙코미디에 가까워서 공감은 물론 소소한 깨달음마저 불러일으킨다.(‘나한테/ 니가// 해준게/ 뭔데’, 하상욱 단편시집 ‘수수료’ 중에서)

그런 까닭에 하상욱의 시는 현대적 삶을 ‘재현’한 글이 아니라 현대적 삶을 그대로 ‘반복’한 디자인에 가깝다. 아울러 그는 깊이가 사라진 세계에서 깊이를 체현하기보다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 모든 것이 조롱거리임을 드러낸다.
자, 그렇다면 시의 민간화 내지는 정치의 민간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다수의 대중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으니, 어느 시인이 애도를 보냈던 시의 죽음은 마침내 중지되는 걸까. 그럴 개연성이 없진 않아 보인다. 하상욱 본인도 호기롭게 새로운 세계를 내다보는 듯하다. ‘니능력은/ 알지만// 이세상이/ 변했어’(하상욱 단편시집 ‘선풍기’ 중에서). 그럼에도 그의 시를 전적인 해답으로 보기엔 여전히 불만족스러움이 남는다. ‘에어컨’에 적응하는 심신이란 어쩐지 나약해 보이지 않는가.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