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릉! 부릉!”
지난 20일 저녁 홍콩 도심 컨벤션센터 특설경기장은 자동차 굉음으로 출렁거렸다. 영국 대 홍콩의 3 대 3 자동차 축구 경기. 두 나라 국기를 단 레이서들이 각 석 대씩 차를 몰고 나와 볼 다툼하며 일진일퇴의 카 드리블 대결을 펼쳤다. 경기 막바지, 3 대 2로 영국이 리드하던 상황. 그러나 미드필드가 주춤하는 사이 일순 영국 수비진에 균열이 생겼다. 등 번호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순간 스피드로 한 홍콩 레이서의 차가 골문으로 돌진한다. 슛. 골이 골문을 갈랐다. 경기 종료 3분여를 남기고 3 대 3 동점. 진행자는 “베컴 없는 영국, 사상 최초로 홍콩이 영국을 이길 수 있는 기회!”라며 흥분했다. 특설 경기장은 피어오른 연기로 자욱하다. 순간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타이어의 마모 때문. 자동차 6대가 종횡무진하기엔 가로 80여m, 세로 30여m 경기장은 너무 좁았다. 결국 종료 직전 한 골을 추가한 영국의 4 대 3 승리.
영국 공영방송 <비비시>(BBC)의 간판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톱기어>(Top Gear)가 ‘라이브’로 홍콩에 왔다. <톱기어>는 32년째 방송되면서 전세계에 3억8천만명의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는 정상의 자동차 리얼 버라이어티 쇼. 월드컵, 올림픽과 함께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로 꼽히는 ‘에프1’(Formula1:국제자동차경주대회)이 낯선 국내에서는 애호가들 사이에 비비시가 내는 잡지로 더 친숙하다. 비비시 관계자는 “유재석, 강호동 등 한국 최고 엠시들이 출연하는 명차의 향연을 곧 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 진출 또한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음을 알렸다. 람보르기니, 페라리 등 수십억원짜리 명차를 몰고 세계 6개 도시를 도는 400억짜리 프로젝트 쇼 <톱기어>의 월드 라이브 투어를 홍콩 현지에서 만났다.

국내 리얼 버라이어티가 중·장년층에게 상대적으로 외면 받는 것과 달리 <톱기어>의 인기는 성별·세대를 아우른다. 취재진이 찾은 20일도 3153석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남녀노소 다양했다(사흘 동안 3회 전회 매진).
다양한 관객들로부터 수십년간 사랑받아온 비결은 다양한 소재 때문이다. 자동차가 빠른지 헬기가 빠른지 등의 소년과 노년층을 두루 자극하는 호기심 해결부터, 억대 명차를 어떻게 하면 빨리 부술 수 있는지라는 경악스러운 설정까지, 차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자세로 30여년을 버텼다.
자국 총리에게 “눈먼 바보”라고 독설 내뿜는 진행자가 21년째 건재하고, 진행자가 시속 464㎞로 차를 몰다 사고로 1년여 요양할 정도로 ‘리얼’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프로그램이 바로 <톱기어>다.
최근 첨단 기술까지 접목되면서 내용은 더욱 풍성해졌다. 이날 라이브 쇼에서 선보인 아파치 헬기와 스포츠카 로터스의 추격 장면은 순간속도를 가늠할 수 없는 차의 실제 질주와 3D 입체영상 기술이 만난 성과였다. 높이 10미터에 이르는 대형 전광판에서 아파치 헬기 한대가 불쑥 솟아오르면서, 행사장 전체가 술렁였다. 이날 관객에게 지급된 입체영상 관람용 안경과 가슴 치는 듯한 음향 효과 덕분에 헬기는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느낌을 줬다.
‘무한도전’을 떠올리는 듯한 진행자들의 몸사리지 않는 ‘망가짐’은 또다른 장수 비결. 진행자 제레미 클락슨은 “세 명의 남자가 바보 같은 짓을 하면서 차를 소개할 것”이라는 말로 쇼를 시작했다. 마흔여덟의 기자인 그는 차에 탄 사람 얼굴만 노출되는, 가죽옷 입힌 우스꽝스러운 미니카로 관객을 즐겁게 했고, 누구도 불쾌하게 하지 않는 독설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키가 작아 시종일관 ‘햄스터’라고 놀림 받은 리처드 해먼드 또한 재치 있는 입담으로 말을 건넬 때마다 청중의 웃음이 터졌다.
■ 지역성에 맞춘 콘텐츠가 중요하다라이브 쇼에서 강조한 것은 지역화였다. 원래 진행자 한 사람을 중국인 자동차 레이서로 교체했고, ‘당신들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쿵후의 몸짓으로 자동차를 압도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홍콩인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런 장면들에서 관중들은 열광했다.
세계 6개 도시를 돌면서 열띤 지지를 확인한 자동차 축구 경기의 한 팀을 홍콩으로 설정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비비시는 해마다 소재를 바꿔 가면서 홍콩에서 라이브 쇼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비비시 월드와이드 아시아 배급부문 이사인 몬티 가이는 “서울, 도쿄에서도 쇼를 계획하고 있다”며 “(스타시스템 중심으로) 진출하기보다 해당 지역이 지닌 특유의 콘텐츠에 어떻게 녹아들 수 있느냐에 방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대형 뮤지컬 등 기존 무대 공연들이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해 세계 공연을 진행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한류에 대해 묻자 몬티 가이는 “개인적으로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면서도 “거기에 등장해 인기를 끈 스타보다 지역에 녹아든 콘텐츠가 더 중요한 열쇠”라고 조언했다. 지역성을 강조하는 이런 전략적 판단에는 비비시의 또다른 간판 유아 프로그램 <텔레토비>가 준 교훈이 컸다. 그는 “텔레토비 라이브 쇼에 어른들이 더 많이 와서 제작진이 더 놀랐다”며 “지역별로 배경인 해님 얼굴을 달리 표현하는 등 약간씩 소재를 비튼 게 주효했다”고 말했다. 진짜 ‘리얼’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버라이어티’한 <톱기어>는 매주 수요일 저녁 8시55분 케이블 방송의 씨제이 헬로비전 비비시 날리지(Knowledge) 채널(603번)에서도 만날 수 있다.
홍콩/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비비시 제공

<톱기어>는 1977년부터 방영된 비비시의 간판 프로그램이다. 원래 정보 전달 프로그램으로 시작했다가 쇼 형식을 가미한 리얼버라이어티로 진화했다.
자동차 전문 저널리스트인 제러미 클락슨, 리처드 해먼드, 그리고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테스트 드라이버 스티그 (The Stig)가 진행하고 있다. <톱기어>는 특정 자동차 기종의 취약점에 대한 날카로운 독설을 비롯한 시승 품평이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건 ‘황당한’ 도전들. 알프스에서 스키와 레이스를 펼치거나 아파치 헬기와 속도 경쟁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실험을 선보여왔다. 이밖에 저렴한 자동차 만들기, 스타와 함께하는 시험운전, 올해의 자동차, 운전자들이 가장 만족하는 자동차 선정 등을 통해 자동차 전문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적 대사나 설정이 늘 입도마에 오르며, 실제 자동차 사고를 내는 등 위험한 운전 태도를 조장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올해 첫 시도인 ‘톱기어 라이브’는 크게 라이브 쇼와 모터링 쇼케이스를 동시에 선보이는 형식. 라이브 쇼는 관객들이 직접 참여하는 시뮬레이션 운전, 오토바이 스턴트, 자동차 볼링,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자동차 축구 등으로 구성된다. 모터링 쇼케이스의 경우 이번 쇼에서는 ‘스파이커’(배우 리롄제가 영화 <워>에서 타면서 유명해졌다) 차종이 세계 처음 공개됐고, ‘007차’로 일컫는 애스터 마틴, 페라리, 람보르기니, 마세라티 등의 명차들도 직접 공수되어 선보였다. 하어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