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아스포라의 눈 /
반년 만에 서울에 왔다. 5일간의 짧은 체류다. 방한의 첫째 목적은 출판사 담당 편집자와 번역자를 만나는 일이다. 지금 3종의 내 새 책 간행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두 번째 목적은 ‘화해라는 폭력’이란 제목의 강연을 하는 것이다. ‘화해’라는 미명 아래 피해자에게 타협과 굴복을 강요하는 담론의 ‘폭력’은 세계적인 현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노예제도, 식민지 지배, 침략전쟁 등의 피해자들(주로 제3세계의 민중)이 진실 해명, 책임자 처벌, 보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세계 각지에서 거세지자 이른바 선진국(옛 식민지 종주국)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런 가운데 눈에 띄기 쉬운 것은 노골적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반복하는 우파나 극우파 담론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 이상으로 눈에 거슬리는 것이 리버럴한 선진국 머조리티(다수·주류)의 담론이다. 그들은 입으로는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법적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처음에는 넌지시, 결국에는 고압적으로 피해자의 요구가 비현실적인 과제임을 시사하면서 화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피해자 쪽의 무지와 몰상식, 원한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담론은 선진국 국민으로서의 기득권을 지키고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욕망을 이면에 깔고 있다.
한국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한 듯하지만, 박유하씨의 책 <화해를 위해서>의 일본판이 지난해 오사라기 지로 논단상이라는 권위 있는 상을 받은 뒤 일본 머조리티의 적지 않은 부분이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다”며 환영하고 있는 현상은 방금 얘기한 것과 같은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와 같은 ‘화해라는 폭력’에는 철저히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그럴 경우 우리가 입각해야 할 지점은 한국이라는 한 국가에 갇힌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전세계 피해자들과의 연대로 열린 반식민지주의라는 원점이다.
이런 얘기를 했는데, 청중에게 정확하게 전달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반적인 한국인이 내가 말한 일본 머조리티의 정신구조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따로 자세하게 논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강연회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사람들한테서 ‘촛불시위’ 현상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일본에서 보도된 걸 보는 것만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워 답답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와서 보니 사태는 이미 진정 국면에 들어가 지금은 오히려 정권 쪽의 반동적 공세가 강화되고 있다. 지인들은 “당신은 정말 운이 나쁘다. 매번 마치 골라내기라도 하듯 운동이 침체기에 들어갈 때에야 찾아오다니”라며 웃었다.
내가 한국에 온 또 한 가지 이유는 ‘이빨’이다. 재작년 한국 체류 중에 이가 아파 누구 소개로 서울 시내 치과병원에 갔더니 임플란트 수술을 하라고 했다. 나는 놀란 나머지 주저했다. 일본의 내 담당 치과의사는 임플란트가 체내에 이물질을 넣는 조처인 만큼 당연히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이뿌리에 염증이 생기거나 심한 경우엔 턱뼈가 썩기도 한다고 얘기했다. 그게 일본 치과의사들 다수의견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치과의사는 “아무 염려 할 것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항변도 못한 채 수술을 받았다. 정말 상상 이상으로 간단하게 끝나 안도했다. 그런데 그 이빨이 일본에 돌아간 뒤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일본 치과의사가 말한 대로였나 보다 하고 후회막급이었다. 턱뼈가 썩는 최악의 사태를 상상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임플란트 수술이 그다지 보급돼 있지 않고 의료보험 대상도 아니다. 어디서 진찰을 받아야 좋을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빨리 서울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내심 안달하고 있었다.
반년 만에 그 치과병원에 갔더니 “아, 조금 헐거워졌군요”라며 금방 고쳐주었다.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치과의사 한 가지를 보더라도 이렇듯, 왜 한-일 간에 이토록 차이가 나는 걸까? “앞으로도 매년 한 번씩 체크하러 오세요”라며 상냥하게 인사하는 치과의사의 배웅을 받으며, ‘이빨’ 때문에 앞으로도 한국에 와야 하는구나, 이것도 또한 나와 조국을 묶어주는 고리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고 기묘한 감개를 느꼈다.
일요일엔 점심식사를 하려고 버스를 타고 종로1가 설렁탕집에 갔다. 한국 체류 중에 내가 즐겨 다녔던 가게다. 꼭 다시 가보리라 다짐했던 가게다. 기대대로 그 맛을 만끽한 뒤 어슬렁어슬렁 광화문 쪽으로 걸어가 교보문고에 들어가서는 글렌 굴드와 카라얀이 공연한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제3번 등 3장의 시디(CD)를 샀다. 일본에 있을 때는 바빠서 서점 구경할 여유도 없었다. 서울에서의 휴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시청 앞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촛불시위’의 흔적이라도 없을까 하고 살피면서. 덕수궁 미술관에서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을 열고 있기에 들어가 봤다. 일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의외로 관람객이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젊은 남녀 커플이거나 가족 나들이객이었다. 열심히 메모하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디에고 리베라 등이 주도한 멕시코 벽화운동은 1960년대 일본에 많이 소개돼 친숙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이미 오랜 기간 일본에서 라틴아메리카 미술전이 열린 기억이 없다. 나 자신도 십수년 전 파리에서 대규모의 디에고 리베라전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한편 이들 예술은 한국에서는 군사정권 시대에 ‘빨갱이’ 예술로 금기시되고 봉인당한 것들이다. 누가 기획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말하자면 지금의 일본 사회가 잊어버린 부분에 한국의 미술 관계자가 눈을 돌린 것이리라. 빈곤, 투쟁, 고문 등을 주제로 한 역동적인 작품을 보러 온 한국인들은 거기서 무엇을 느꼈을까. 그저 안락한 소시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사람들이 ‘촛불시위’의 주역이었을까, 그런 상상들을 해봤지만, 너무 단순한 상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