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아스포라의 눈 /
일본으로 돌아와 그동안 학교 숙사에서 생활하다 다시 도쿄 교외 ㄱ시의 집으로 옮겼다. 2년이라는 세월은 짧고도 길다. 생활이 점차 안정돼 가면서 그동안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토씨가 안 보인다”고 아내가 신경을 썼다. 가토씨는 전에 내가 ‘심야통신’에 썼던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ㄱ시 역 앞에서 <빅 이슈>라는 잡지를 팔고 있었다. 그 잡지는 홈리스의 자립을 지원할 목적으로 간행되는 것인데, 200엔짜리 잡지 하나를 팔면 110엔이 남는다. ㄱ시 역 앞에서 잡지를 팔던 가토씨는 행인들의 호감을 사 우수한 판매성적을 올렸다. 내 아내도 그와 친해졌다. 2년 만에 돌아와 보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방을 얻어 평온하게 살고 있으려나?” “아니, 저금한 돈을 술 마시는 데 다 써버리고 어딘가로 흘러간 게 아닐까?” 우리 부부는 그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역 앞에서 아내가 잡지를 팔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하지만 가토씨는 아니었다. 아내는 급히 그 사람에게 달려가 가토씨 소식을 물었다.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돌아온 아내는 말했다. “돌아가셨대요.”
아내도 나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한국에 가기 전 2년 정도 서울에서 살게 됐다고 했더니 “2년 동안이라… 나는 그렇게 오래 살진 못할 거요”라고 가토씨는 중얼거렸는데, 그 말대로 돼버렸네, 하고 아내는 말했다.
역 앞에서 잡지를 팔고 있던 새 판매원 얘기로는 언제나 공원 미끄럼틀 밑에서 자던 가토씨는 잡지를 팔아 저축한 돈으로 작은 방을 얻고 생활보호도 받게 돼 홈리스 생활을 졸업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내 안정된 그 생활도 길진 못했다. 어느날 이발소에서 샴푸로 한참 머리를 감고 있던 그가 돌연사한 것이다. 사인은 잘 모르겠다. 뇌출혈이나 심근경색이 아닐까. 오랜 홈리스 생활이 준 부담 때문에 어지간히 몸이 상했을 것이다. 보기엔 노인이었으나 실제로는 아직 60이 될까 말까 한 나이로, 나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그래도…” 하고 입을 열자 마치 내 말을 막듯이 아내가 “그래요” 하고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토씨는 잘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오래 이 일본 사회에서 살아간다 한들 어렵고 고통스런 경험밖에 더 하겠나. 인간은 언젠가는 죽기 마련인 존재인 이상 그가 자력으로 홈리스를 졸업했다는 달성감을 성취한 직후에 큰 고생 없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던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부러울 지경이다. … 이것이 그때 우리 부부가 동시에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이 잘못된 걸까?
2년 정도 서울에서 살게 됐다고 했더니 “2년 동안이라… 나는 그렇게 오래 살진 못할 거요”라고 가토씨는 중얼거렸는데, 그 말대로 돼버렸네, 하고 아내는 말했다. 어쩌면 가토씨는 잘 죽었는지도 모른다.
고이즈미 정권 때부터 계속돼온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 현재 일본 사회는 약자에게는 ‘생지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살벌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대기업은 전례없이 큰 이익을 올리고 있지만 계층격차가 극단화했다. 사회보장제도는 기능부전에 빠지고 의료제도는 붕괴 직전이다. 일본에서는 지금 연간 3만명 이상이 자살하고 있다. 하루에 90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노인에게도 젊은이에게도 일찍이 이토록 불안에 가득 찬 시대가 있었을까. 게다가 최근에는 석유와 농산물 가격 인상으로 식료품 소매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그런 사회, 그런 시대를 가토씨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순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 소식이 있었다. 레바논에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의 ‘양아들’인 아흐마드가 ‘학업 부진’이라는 이유로 중학교에서 퇴학당했다는 것이다. 아흐마드는 레바논 남부의 난민캠프에서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아이다. 7년 전 우리 부부는 그의 양부모가 됐다. 법률적인 양부모가 아니라 현지와 일본 엔지오(NGO)의 중개로 빈곤가정 아이에게 중학교 졸업까지 교육지원금을 보내는 게 양부모의 일이다.
아흐마드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어머니와 형 둘, 누나 둘 해서 5인 가족이다. 어머니는 청소부고 누나 중 한 명은 어머니를 돕기 위해 중학교를 중퇴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가 학비를 원조해온 아흐마드가 중학교를 중퇴한 것이다. 이 지원활동에는 학교를 퇴학한 아이에게는 지원을 계속할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이제부터는 새로운 다른 양아들을 지원하게 된다.
오늘(15일)은 ‘나쿠바’ 60돌이 되는 날이다. 60년 전 그날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해 이스라엘 건국이 강행됐고 동시에 약 70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난민이 됐다. 그날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나쿠바’라 부른다. ‘대파국’이라는 의미다. 그 뒤 전쟁을 통해 점령지를 확대해온 이스라엘은 지금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분리장벽으로 에워싸는 한편 점령지에 불법적으로 계속 자국민을 정착시키고 있다. 세계는 이 불법행위를 60년 동안이나 팔짱을 낀 채 수수방관하고 있다.
어제 <아사히신문>에 ‘팔레스타인-멀어진 고향’이라는 장문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레바논에 사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상황은 실로 비참하다. 12개 캠프는 전기·수도 등의 인프라 정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은데다 과밀상태다.

난민들에겐 레바논 시민권도 주어지지 않고 변호사나 의사 등 70개 이상의 직종에 취업할 수 없다는 규제조처까지 취하고 있다. 한 조사에서는 4명 중 1명이 실업자고 그 반수를 15살에서 24살 사이의 젊은이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캠프에는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이 넘쳐나고 약물(마약)에 빠져든 사람도 많다”고 한다.
“아흐마드는?” 하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 아이가 마약에 빠진 걸까?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려는 걸까?” 심란하다. 그토록 희망 없는 상황에서 ‘학업 부진’에 빠졌다 한들 누가 그를 책망할 수 있을까?
2년간의 한국 체류 중에 내 주변에도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작은 변화다. 하지만 세계가 분명히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변화다.
서경식/도쿄경제대학교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