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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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말

지난번 글에도 썼듯이 광주 전남대학에서 11월27일부터 사흘간 열린 ‘상호문화철학의 문제들- 지구화 시대의 연대와 소통’이란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했다. 회의 타이틀에 ‘연대’라는 말이 흥미를 끌었다. 최근 일본에서는 학술회의 타이틀에 이 말이 사용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연대’라는 말은 1960년대, 70년대 학생운동에서 마구 남발했으나 그 당시 학생이었던 세대, 즉 현재의 기성세대에게 지금은 쑥스럽게 웃지 않고는 입에 올릴 수 없는 어색한 추억과 같은 것이 돼버렸다. 타자와의 연대에 실패해온 일본인들의 현대사가 이 아름다운 말을 일종의 ‘사어’로 만들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전남대 국제회의 타이틀은 일본에서 온 나로선 신선한 재발견이었다.

해외에서 온 참가자 라인업(진용)에도 마음이 끌렸다. 재독 한인 여성학자 최현덕 박사를 빼고는 처음 이름을 듣는 사람들이었다. 라울 포르네트-베땅쿠어 교수는 재독 쿠바인. 알베르틴 취빌론디 응오리 박사는 재벨기에 콩고인. 클라우디아 비크만 교수는 독일인. 디아나 데 발레스카 팔란카 교수는 재포르투갈 스페인인. 마리아 필라 아퀴노 교수는 미국 대학에서 가르치는 멕시코인이다. 베땅쿠어 교수 외에는 모두 여성이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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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 국민주의의 어제와 오늘- 재일조선인의 입장에서’라는 보고를 했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주의’란 인간을 ‘국민’과 ‘외국인’으로 구별하고, 보편적이어야 할 인권을 ‘국민’에게만 허용된 배타적인 특권처럼 행사하는 심성을 가리킨다. 응오리 박사와 아퀴노 박사로부터,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와 놀랄 만큼 공통점이 있다는 반응을 얻었다. 한 사람은 유럽에 사는 아프리카인, 또 한 사람은 미국에 사는 멕시코인, 나는 일본에 사는 조선인이다. 모두 선진 자본주의국에 거주하는 제3세계 출신의 소수자다.

아퀴노 교수는 ‘페미니즘적인 상호문화적 신학의 이해와 목적’이라는 보고를 했다. 그녀는 ‘제3세계’라는 말 대신에 ‘3분의 2 세계’라는 말을 썼다. 세계인구의 3분의 2가 빈곤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다는 의미다. 선진 자본주의국의 에고이즘에 대한 불을 토하는 듯한 격렬한 비판이다. 그녀는 보고 말미를 다음과 같이 매듭지었다. “우리의 임무에는 ‘사회적으로 비주류화되고 무력한 자들이 그들의 관심사, 추구하는 일, 정의의 비전을 표현하는 적극적인 참여자가 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을 위한 열린 사회제도적 공간을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일이 포함된다. …종교적 언어와 자원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정의의 세계가 지상에서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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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응답에서 60년대 민족해방투쟁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해방신학과의 관계를 묻자, 그녀는 “나는 해방신학자들의 제자다.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그들 속에 있는 남성중심주의와 싸우기로 결의하고 페미니즘 신학의 길을 걸었다.”라고 대답했다. 페미니즘 신학은 기성 신학과 어떻게 협조해갈 것이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우리는 허락을 구할 생각은 없다.”고 간결하게 답했다. “왜 신학인가?”라는 질문도 나왔다. 의도나 문제의식은 이해할 수 있으나 왜 철학이나 사회학, 그리고 그밖의 학문분야가 아니라 신학이라는 틀 속에서 그걸 실천하려 하느냐는 물음이다. 이 질문에 대해 그녀는 “나는 거기서 자랐다. 그것이 나의 문화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엘레강트한 멋쟁이지만 장난기도 많았다. 격렬한 논의 한중간에도 단상에서 청중 한 사람에게 카메라를 건네주며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회의가 끝나고 전남대 교수들과 가라오케에 갔는데, 데킬라(멕시코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킨 그녀는 탱고와 삼바를 멋진 스텝으로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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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물에 대한 흥미를 누를 길 없어 나는 서울에 돌아온 뒤에 다시 한번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메스티조(유럽인과 원주민 혼혈)다. 멕시코 남부의 매우 가난한 지방에서 태어났다. 농업노동자였던 아버지는 1년의 절반은 미국에 돈벌이하러 갔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돌아올 때마다 어머니는 임신했다. 그 결과 여덟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며 그녀는 웃었다. 이윽고 그들 일가는 멕시코 북부 국경지대로 이주했다. 아버지가 미국에 갔다 오는데 편리했기 때문이다. “나는 경계선 위에서 자랐다.”고 그녀는 말했다. 당시 국경은 열려 있었다. 국경지대에 사는 멕시코인에게는 미국령에 자유왕래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핑크 카드라는 게 주어졌다. 매일 국경을 넘어 물건사러 다녔다. 그 국경이 지금은 엄중하게 닫혀 있다. “특히 9.11사태 이후는 악몽이다. 미국은 가난한 자를 모두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고 있다.”고 그녀는 어조를 높였다.

부모는 교육에 열심이었으나 가난했기 때문에 8명의 형제들 중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건 그녀뿐이었다. “10년간 가톨릭 수녀 생활을 했다. 그렇게 해서 신학교에 진학하는 것만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왜 신학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 여러 학문분야 가운데서 자유롭게 진로를 선택하는 사치는 그녀에겐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온 현실이다. 미국의 대학 교수가 되기까지 얼마나 긴 길을 걸어왔던가. 하지만 ‘엘리트’의 일원이 된 지금도 부모형제야말로 자신의 에너지원이며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안식처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도 내 가족에 대해 말하고 재일조선인의 현실에 대해 말했다. “그 얘기를 영어로 번역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더 알아야 할 얘기다.”라고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전세계의 소수자들은 분단돼 있고 서로 소통하기 어렵다. 하지만 공통의 곤란을 체험하고 공통의 문제로 고뇌하고 있다. 그것을 알려는 노력이 ‘연대’로 가는 첫걸음이다. 일본에서는 죽어버린 말이 여기에는 아직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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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한승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