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했어요?” 콜롬보 같은 도시나 캔디 같은 유명 관광지에서는 “아 유 매리드?”, 탕갈레 어촌이나 도시 뒷골목쯤에서 만난 트리윌 기사들은 “밴덜라더?” 들입다 싱할라어로 물어댔다. 버스 옆자리에 우연히 앉은 여자들도 그랬다. 도대체 처음 만나 금방 헤어질, 이름도 얼굴도 기억 못 할 다른 나라, 남의 여자의 결혼 유무가 왜 이다지도 궁금할까, 나도 궁금할 지경. 서양에서 아시아 여자들의 외모 갖고는 나이 구분을 잘하지 못한다는 건 알았지만 스리랑카 사람들도 한국 여자인 내 나이를 어림짐작도 못 했는데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게 외모가 아니라 태도와 분위기 때문이라는 것을. 많은 스리랑카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서 ‘여자 혼자’ 사는 것 자체를, 남자 없이 여자들끼리 또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도무지 납득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당연히, 결혼했다 대답하면 남편은 어디 있느냐, 아이는 몇 살이냐, 누가 돌보냐, 왜 가족과 따로 사냐에 이르기까지 사생활 질문이 노골적으로 이어졌다. 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표정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기미만 보여도 ‘나 결혼했고, 남편은 지금 집에 있고, 아주 잠깐 혼자 일 보러 다니는 중’이라고 둘러대곤 했다. 그런데 2년이 다 되도록 삼십 대 말 집주인 여자 닐루씨와 사십 대 중반쯤의 학생들의 엄마들은 왜 혼자 스리랑카에 와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들에게 그다지 부럽지는 않은, 어쩌면 외로워 보이는, 이해 못 할 존재인 게 분명했다.

만나기만 하면 “페이스북 해요?” 친구신청을 해대는 학생들의 페이스북 약력 및 경력 소개 문구는 거의 다 ‘No Job’ Company, 백수. 일종의 직업전문학교인 테크니컬 칼리지의 내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갓 마친 18살 아이와 이일 저일 하다가 입학한 24~5세 청년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이 또래의 아들을 둔 엄마들의 나이는 40살 초중반, 스물두세 살 즈음에 결혼해 아이 낳고 살림살이하는 전업주부들이었다. 학부모인 그들은 나보다 젊었고 내 학생들도 한국의 내 아이들보다 어렸다. 암암리에 내 신상을 파악한 학생들은 종종 한국어로 ‘할머니’라 놀렸지만, 엄마들은 얼굴을 마주 보고 나이를 듣고도 잘 믿지 못했다. 가끔 젊은 여자 대하듯이 학생들 앞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가끔 아저씨처럼 보이는 학생들이 제 엄마와 나를 번갈아 보며 와하하 웃어댔다.

더운 나라여서 단열이나 방음에 신경 쓰지 않고 지은 창틀과 문이 뻥 뚫린 이 나라 집들의 특성상 사람 사는 살림살이의 모든 소리와 몸짓이 다 들리고 보였다. 울고 웃고 말하는 소리, 혼내는 소리, 밥 짓고 먹는 소리, 다투는 소리, 웃통을 벗은 채 엉덩이에 슬쩍 걸친 사롱(남성용 스커트랄까)의 샅을 무시로 긁고 만지는 남자들과 양말도 신지 않고 맨발로 사는 여자들의 종종거리는 움직임은, 그들이 감추지 않았으므로 아무렇지도 않게 내 생활로 들어와 흘러갔다. ‘지지고 볶는’ 일상에 모든 시간과 노력을 들여놓고 사는 아래층 닐루씨와 엄마들에게 홀로 유유자적한, 후딱 하면 가방 메고 여행을 떠나는 한국 여자의 모양새는 요령부득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꾸준히 그녀들의 존재를 수업 시간에 불러내어 엄마의 일과와 삶의 역사를 관찰하고 쓰고 말하게 했다. 우리 엄마는… 그로 시작되는 그녀들은 너나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코코넛을 직접 갈아내 코코넛밀크를 만들고 밥을 지었다. 어떤 육아 도구도 없이 아이들 서넛을 맨손으로 옆구리에 안아 키웠다. 맨발로 모든 집안일과 밭일을 해냈고 여행은 모든 가족과 함께 밥을 해 먹이면서 다녔다.

그런 엄마들이 매일 아들 손에 바나나 잎으로 감싼 카레와 밥을 들려 보냈다. 시나몬과 강황을, 생일 떡과 풋과일을 함께 먹으라며 그득그득 싸 보냈다. 가가호호 가정방문을 갈 때마다 나보다 젊으나 더 어른 같은 그녀들이 만든 밥을 먹고 부엌을 둘러보았다. 코코넛 껍질로 불을 지핀 작은 버너에 밥과 찌개를 만들고 기름을 짜내는 맨발의 거친 손을 잡고 말했다. 제발, 당신 아들을 위해서라도 부엌일을 가르치세요. 이제 제 손으로 밥을 해먹어야 하니까 요리를 가르쳐야 해요. 그녀들은 짐짓 딴말을 했다. 한국은 잘사는 곳이라던데, 왜 여기 와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아이들 안 보고 싶어요? 외롭지 않아요? 그러고는 사실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금세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 이제 내 아들 한국 가면 밥을 해 줄 수 없어요. 더는 밥을 먹여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더 밥을 해주고 싶어요. 여기서 아들에게 요리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권혁란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코이카 스리랑카 한국어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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