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1월11일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먼저 들른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도쿄의 총리관저에서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와 환담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베트남 등도 위험하다”며 “자유국가 그룹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
1961년 11월11일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먼저 들른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도쿄의 총리관저에서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와 환담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베트남 등도 위험하다”며 “자유국가 그룹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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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 국교정상화교섭의 기록이동준 편역/삼인·10만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일 정부간 이른바 ‘최종적·불가역적 합의’ 발표 뒤 이 정치적 담합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양국관계가 더욱 꼬여가고 있다. 한일관계는 이렇듯 될 듯하다가도 되는 게 없다. 왜 그럴까? 광복 70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는 양국간 과거사 난제들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주요 문건들이 공개됐다. 1965년에 타결된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 14년 역사의 전말을 담은 일본 쪽 종합평가보고서 <일한 국교정상화 교섭의 기록>에 담긴 문건들이다.

1200쪽에 이르는 이 책은 1968년에 만들어진 일본 외무성의 ‘일한 국교정상화 교섭사 편찬위원회’(아시아국장이 위원장)가 2년6개월간 검증작업을 거쳐 완성한 백서 <일한 국교정상화 교섭의 기록>의 제1편 ‘총설’을 옮겨 같은 제목으로 출간한 것이다. 백서는 1편 외에, 교섭에 관여한 일본 조야의 주요 인사 수기·인터뷰 기록인 제2편, 연표와 대표단 명단, 양국 국회 내의 한일문제 등을 담은 제3편으로 구성돼 있다. “한일회담 전체 과정을 사실 확인을 거쳐 체계적으로 정리한 일본 쪽 자료로는 사실상 유일하다”는 이 백서는, 그러나 이제까지 제대로 공개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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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준 기타큐슈대 부교수가 아사노 도요미 와세다대 교수와 ‘일한회담 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 등의 도움을 받아 편역한 이 책의 문건들은 2006년 8월부터 하나둘 공개된 것들이다. 그런데 백서 형태 그대로가 아니라 각 장별로 분리해서 비밀해제된 다른 문건들과 뒤섞어 시차를 두고 공개했기 때문에 전모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공개한 문건들도 처음엔 20% 이상이 삭제되거나 비공개 상태였다. 백서의 백미요 한일관계 이면에 대한 결정적 증언일 수 있는 제2편은 일부가 인용됐을 뿐 공개하지 않았다. 한반도 반출 문화재 목록, 유출 경위, 취득가격 등의 기록도 대부분 아직 비공개다.

부족하나마 이 책만으로도 중요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1951년 9월15일 일본 외무성 지바 아키라 사무관은 점령군(미군) 총사령부 외교국 설리번에게서 “애치슨 국무장관이 시볼드 (주일 미국)대사 앞으로 시급히 일한관계를 정상화(normalize)하라는 훈령을 보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달 25일에는 총사령부가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 문제를 한국 외무부와 협의하라고 일본 정부에 ‘지시’한다. 이에 따라 여러차례의 예비회담을 거쳐 1952년 2월15일 제1차 본회의에서 마쓰모토 일본 수석대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평화조약 정신에 기초해 이를 준수하고자 한다”고 밝힌 뒤 회의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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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시볼드에게 한일관계 정상화 지시를 내린 1951년 9월15일은 한일관계와 동아시아 전후 질서를 결정지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된 지 1주일이 지난 시점이다. 원래 그 강화조약에는 한국이 연합국(전승국)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돼 있었으나 막판에 일본 쪽 요구로 제외됐다.

한국 형편이 가장 어려웠던 한국전쟁 와중에 이처럼 미국 지시로 시작된 한일 교섭이 대등하게 진행될 리 없었다. 식민지배가 은혜였다는 ‘구보타 망언’ 등이 난무했다. 교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규정대로 한국이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과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나라가 아니라 일본제국의 일부였다가 일본 패전으로 ‘분리’(separation)된 나라임을 전제로 시작됐다. 분리는 그 이전 과정이 합법이었다는 얘기고, 따라서 일본이 사죄도 배상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의미한다. 배상이 아니라 독립축하금, 지원금, 경제협력자금 등으로 포장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등 당시 일본의 지원자금에 대해 청구권이란 말조차 쓸 수 없었다. 3억달러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도 미국이었다. 냉전 시절 베트남전에 본격 개입하던 미국에 한일 협력은 긴급했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에겐 미국 지지가 긴요했다. 1965년에 서둘러 발간된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 백서>는 당시 팽배했던 협정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이런 사실을 숨기거나 왜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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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한일 국교정상화가 어떤 면에선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정치적 담합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번의 ‘최종적·불가역적’ 담합 뒤에도 한·미·일 삼국 군사동맹을 겨냥한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그것은 50년 전 담합의 반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편역자는 이처럼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한일관계가 제대로 풀릴 리 없다면서, 일본군 ‘위안부’ 개인들의 대일 배상청구권 요구가 합헌이며 징용 피해자들의 대일 보상 요구도 정당하다고 한 2011년 8월 헌법재판소 결정과 2012년 5월 대법원 판결을 들어 ‘1965년 체제’는 이미 “법적으로 붕괴 직전의 상태”라고 지적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담합은 이런 흐름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