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현행 도서정가제는 그 명칭을 ‘도서 할인 촉진법’이라 불러야 옳다. 책은 정가 판매 상품이 아니고 대부분의 책은 무한 할인이 가능하다는 것이 ‘한국식 도서정가제’의 본질이며, 정가제가 없는 소비상품들보다 훨씬 높은 할인율이 횡행하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어려운 참극 수준이다.

일간신문처럼 생산자가 붙인 가격을 최종 소비자가격으로 삼는(재판매가격유지) 정가제도의 취지나 다품종 소량 생산 지식문화상품의 시장질서 유지라는 법리는 찾기 어렵다. 소규모 언어권 출판시장의 생태계가 존립하기 위한 기본 질서인 도서정가제가 작동하지 않으니 책의 생산-유통-소비가 흥할 까닭이 없다. 문화산업진흥기본법, 출판문화산업진흥법, 독서문화진흥법 등 온갖 진흥법과 진흥기관이 있다 한들 백약이 무효하다.

지난 5년 사이(2008년 → 2013년) 신간 발행종수는 4만3000종대로 정체 상태이고, 1종당 평균 발행부수는 2471부에서 2005부로 19% 감소했다. 가계 월평균 도서구입비는 학습참고서가 10.9% 감소하고(1만2409원→1만1060원), 일반 단행본은 무려 25.4% 감소했다(1만229원→7630원). 할인 경쟁의 아수라장에서 서점은 2042개(2007년)에서 1625개로 20% 줄며 서점 없는 전국 읍·면·동이 절반을 넘어섰다. 할인 전략을 날개 삼아 고속성장하던 인터넷서점들조차 2012년부터 마이너스 성장세로 허리가 꺾였다. 반면 평균 정가는 1만2116원에서 1만4678원으로 21% 상승했다.

광고

이 수치들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제대로 된 정가제가 없는 상황에서 책과 관련된 모든 통계가 온통 빨간 경고등만 켜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할인용 거품 가격을 반영한 정가 상승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출판시장을 죽이는 악법의 지배를 얼마나 더 받아야 하는가.

1년 넘게 표류 중인 도서정가제 개정안(최재천 의원 대표발의안)에 대해 관련업계와 소비자단체가 얼마 전 단일안에 합의했다. 발행일이 18개월 이상 지난 구간, ‘무늬만 정가제’에서 제외됐던 실용서와 초등 학습참고서, 도서관 판매 도서 등을 정가제 대상에 포함하기로 한 것은 개정안에 부합한다. 그러나 개정안의 핵심인 도서 할인 총한도는 15%로 합의했다. 신간에 적용되던 10% 직접 할인율은 그대로다.

광고
광고

만약 민간 합의대로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당장 급한 불(과당 할인)을 끄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출판시장 개선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여지없이 15% 할인율만큼의 거품가격이 제도화되고, 편법적인 할인 쿠폰과 경품 등 간접할인 또한 기승을 부릴 것이다. 출판사에서 공급받는 가격(공급률)이 인터넷서점보다 20% 이상 높고 임대료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중소서점들은 할인경쟁에 밀린 폐업 행렬이 이어지며 출판시장 축소를 가속화할 것이다.

프랑스 정부와 국회는 정가제에 대한 철학과 의지를 가지고 랑법(도서정가법)을 강력하게 유지해 왔다. 우리나라 국회나 정부처럼 민간의 합의만 종용하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문화 융성’과 책의 생존을 위한 입법권과 행정권을 기대한다. 출판계 역시 총의를 모아 도서 공급자의 위상에 맞는 유통제도 구축으로 출판산업의 기틀을 새롭게 다질 때다.

백원근 재단법인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