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지은이
만화가·<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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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는 싫어요. 오래 살고 싶지요. 그러나 몇 살까지 살아야 충분히 오래 사는 걸까요? 믿거나 말거나, 옛날 중국의 팽조라는 사람은 700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명령이라는 나무는 500년이 한 계절이고 대춘이라는 나무는 8000년이 한 철이었대요. 팽조 역시 전설 속의 나무들에 비하면 요절한 셈이지요.(<장자>, ‘소요유’) 길건 짧건 삶은 덧없는 것.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고독한 일입니다. 나 대신 남이 죽어주는 이야기는 신화 속에서나 가능해요.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조차, 살아남은 이는 더욱 고독하더군요.(에우리피데스, <알케스티스>) 목숨을 버릴 정도로 자기를 사랑해주던 사람이 떠나니까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라틴어 경구는 우리에게도 낯이 익어요. 모리(mori)는 ‘죽는다’는 동사의 부정사 꼴. 프랑스어 모르(mort, 죽음)니 영어 모털(mortal, 죽음을 면할 수 없는)이니 따위 낱말이 그 후손이래요. 그런데 큰언니뻘인 말로 옛 그리스어 브로토스(brotos)가 있어요.(입술소리 ㅁ과 ㅂ은 서로 통한다지요.) 그 뜻은 ‘인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바로 ‘죽음’을 떠올린 거죠. 죽음은 곧 인간의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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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라는 말은 미술사에서도 자주 나와요.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물’을 뜻한대요. <죽음의 춤>이라는 장르도 있습니다. 사회 각계각층, 나라님부터 가난뱅이까지 부자 양반부터 노동자까지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 춤을 춥니다. 사이사이에 끼어선 댄스 파트너는 바로 해골의 모습을 한 죽음. 권력자도 평범한 사람도 어느 누구도,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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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바로 메멘토 모리의 역설이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고독으로 밀어 넣지만 또한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인간이니까요. “죽음은 모두에게 보편된 것”(모르스 옴니부스 콤무니스, mors omnibus communis)이죠. 죽음을 생각할 때 인간은 더는 혼자가 아닙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시인 윤동주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합니다.(<서시>)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쉽게 쓰여진 시>) 나도 당신도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서로에게 손 내밀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요.

죽음 앞에서 누구나 고독하기에 거꾸로 죽음을 생각할 때 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내가 됩니다. “사랑하는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청년 전태일의 유서입니다.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40년 전 이맘때 그는 자신의 몸에 불을 지폈지만, 그 죽음 이후 많은 사람들이 서로 연대의 손을 내밀어 친구가 되었지요. 그가 ‘굴리다 다 못 굴린 덩이’를 굴려가는 동안, 우리 역시 더는 죽음 앞에 무력한 존재만은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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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지은이

* 그림은 뤼벡의 <죽음의 춤> 가운데 ‘황제·상인·농부’ 부분 패러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