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광고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

〈한낮의 어둠〉아서 쾨슬러 지음·문광훈 옮김/후마니타스·1만2000원

세월이 흘렀다고 세상이 마냥 좋아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때가 있다. 이즈음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세계문학전집을 볼라치면 꼭 그런 생각이 든다. 1960년대 전집시대로 회귀한 듯싶다. 너도나도 펴낸다는 점에서 그런데다, 목록을 보면 그때 나왔던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싶어서다. 물론 더 확장되고 깊어진 면도 있지만, 핵심을 이루는 목록은 역시 60년대와 유사하다. 그럴 때면 생각나는 기획이 있다.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과 리차드 라이트의 <토박이>, 그리고 지그프리드 렌츠의 <독일어 시간>이 당당히 목록에 올라 있던 ‘한길세계문학’이 그것이다. 앞선 세대의 문학전집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그러나 빼어난 문학적 상상력과 시대상황에 대한 치열한 도전정신이 담긴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그 가운데 여전히 강한 인상으로 남은 작품이 <한낮의 어둠>이다. 최승자 시인이 우리말로 옮긴 이 작품은 그야말로 전율하며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같은 책에 실렸던 실로네의 <빵과 포도주>는 운이 없는 작품이었다. 쾨슬러의 작품이 한낮이었다면, 이 작품은 그 여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림자 같은 작품이 되고 말았다. 이때 느꼈던 감동과 흥분을 떠올리면 오늘 즐비하게 나온 세계문학전집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광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 <한낮의 어둠>이 다시 나왔다. 정말, 나는 이 작품이 새로 출판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우리의 출판은 이미 이런 정신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고 여겨서였다. 책을 낸 출판사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우리에게 필요한 세계문학은 이런 유의 작품이 아닐까. 우리 문학의 창고에는 아직 없으나 우리 시대에 유효한 성찰거리를 던져주는 작품, 왜곡과 오해로 그 진상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내용을 정직하게 드러낸 작품, 작가의 주제의식이 버거워 읽는 내내 큰 지적 고민의 늪에 빠지게 하는 작품 말이다.

<한낮의 어둠>은 스탈린 시대에 저질러진 잔인한 숙청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특정한 나라의 특별한 사건을 주목하도록 이끌지 않는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꼿꼿하게 내걸렸던 혁명의 깃발이, 그 정신의 죽음을 알리는 조기로 전락하고 마는, 그러니까 혁명 이후의 권력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1980년대 이 작품을 읽으며 무척 괴로워했던 이유가 다시 떠오른다. 그 시기야말로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혁명 이후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가. 나는 이념과잉의 시대에 이 작품을 읽으며 지적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백신주사’를 맞았다 여겼다. 더욱이 이 작품은 공산권에서 이뤄진 광범한 숙청의 희생양을 재평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독재정치로 귀착한 혁명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반대파의 자리에 섰으나, 혁명의 열매를 부정하지 않기 위해 권력의 요구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것이 그것이다. 정말 그랬을 것이냐 하는 대목에서는 논란이 일 수 있으나,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고
광고


북한의 삼대세습문제를 놓고 진보진영 사이에 논쟁이 격렬하다. 엉뚱할지 모르겠지만, <한낮의 어둠>을 읽으면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알 수 있을 터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 혁명정신을 갉아먹었노라 쾨슬러는 말한다. 자고로 타락한 권력은 시대의 특수성만을 강조했고, 진정한 진보정신은 그 가운데도 동의해야할 보편성이 있다고 말해왔다. 20세기의 거대한 실험은 명백히 실패했다. 이제 불씨를 되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쾨슬러는 ‘경제적 숙명성’과 ‘대양적 감정’을 모두 아는 새 정신에 기대를 걸었다. 나는 지금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

이권우 도서평론가·안양대 강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