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도정일 박원순 외 지음/휴머니스트·1만7000원
2008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어째서 그토록 빠르게, 쉽게, 어이없이 후퇴와 퇴행과 반전을 강요받게 되었는가?(도정일)
출판사 휴머니스트가 기획하고 <오마이뉴스>와 공동으로 진행한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 특강’을 묶은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에 등장하는 12명의 연사들이 진단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앓고 있는 병. 그것은 ‘역진화’다. 항성계의 노화와 함께 어느 행성의 생물들이 예컨대 인간과 같은 지능을 지닌 고등생물에서 이구아나돈과 같은 파충류로 퇴화해간 사실을 보여주는 유적 탐사 얘기를 담은 과학소설(SF)도 있지만, 봉건과 식민과 군사독재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마침내 민주주의로 진화해온 사회가 어느날 돌연 자신들이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빠져나온 과거 쪽으로 되돌아가는 역진화를 시작한다? 무엇 때문에?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는 50년 한국 민주화운동의 근원적 실패 지점과 미완의 부분을 성찰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모색하고 전망한다.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는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를 이렇게 요약한다. “국가 권력의 비민주적이고 반민주적인 오용과 남용, 정부 기관들의 반민주적 정책과 행태, 공권력에 의한 인권과 국민 기본권 유린, 시민 위협, 사생활 침해, 언론 옥죄기, 지방자치단체들의 횡포와 공무원들의 비민주적 정신상태, 수임받지 않은 사적 시장권력과 언론권력에 의한 민주주의 파괴행위, 집권당 국회의원들의 민주적 역량 결핍 등 지난 2년 사이에 발생한 수많은 사건과 사례들은 한국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퇴행과 반전의 충격적 실상을 웅변한다.”

진중권씨는 이명박 정부의 이런 퇴행을 “그의 머릿속엔 삽 한 자루”라는 말로 압축했다. “비전 자체가 산업화 초기에 머물러 있으니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죠.” 국민 대다수는 이미 정보사회로 가 있는데, “대통령 혼자 뒤로 가서는 계몽하겠다는 둥 홍보하겠다는 둥 세뇌하겠다는 둥 하고 있어요. 시대착오적입니다. 박정희 흉내를 내고 있다고나 할까요?”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이런 역진화의 원인을 “사적 이익의 공적 조정 역할”을 맡아야 할 국가의 탈공공화, 사사화, 시장화에서 찾았다. 이로 말미암아 사회권력자원의 분배가 힘센 자들한테로 집중되는 과두화, 초집중화, 세습화, 역근대화가 일어나고 힘없는 개인들은 개체화, 자영화, 만인 불안화 속에 ‘루저’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역진화는 단지 정부의 민주화였을 뿐인데도 사회나 공동체의 민주화를 이뤘다고 착각한 지난 ‘민주정부’ 때부터 시작됐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는 사회가 “거의 해체 단계”에 이르렀단다.
그럼에도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지지율은 떨어질 줄 모른다는데, 왜 그럴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말한다. “여러분, 우리가 피땀 흘려 민주화를 이뤘는데, 민주화가 되고 난 다음에 살림살이 좋아졌어요? …민주화되고 진짜 좋아진 건 재벌이고, 그다음이 조·중·동 아닙니까? 억울하지 않으세요? 민주주의가 왜 이렇게 됐죠? 어쩌다가 민주주의가 여의도에서 투표하는 절차 정도로 찌그러져버렸죠? 민주주의를 우리 삶과 관계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잖아요, 그래 놓고서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백날 떠들어봐야 뭐합니까? 민주주의가 내 삶과 연관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실현돼서 내 삶이 좋아지는 게 있어야 민주주의를 위해서 뭘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에요.” 이른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것인데, 한 교수의 대답은 “그렇다. 밥 먹여준다”다. 그에 따르면 1987년 6월항쟁으로 열리기 시작한 민주화 공간에서 그해 여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다. 그 결과 노동자들 임금이 껑충 뛰었고 그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폭발한 소비 덕에 나라살림도 크게 좋아졌다.
잔업 철야가 줄고 영화관객이 수십만 단위에서 수백만, 천만 단위로 급증하고 평균수명이 대폭 늘어나는 등 생활의 질이 크게 개선됐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된 자본과 기득권 세력의 반격이다.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노조가 파괴되고 비정규직이 양산됐으며 민주주의는 4년마다 한 번씩 투표할 때만 주인 행세 하는 껍데기로 형해화했다.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를 보면 이런 역진화는 미국에서 먼저 진행됐다. 독점자본을 규제한 민주당 정권의 뉴딜정책으로 오랫동안 수세에 몰렸던 공화당 중심의 미국 자본가·기득권세력은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로널드 레이건이 정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고 부시 가문 집권 때 그 절정에 도달했다. 월스트리트발 금융공황으로 공화당 정권은 무너졌으나, 그것을 한 템포 뒤늦게 흉내내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위세는 여전하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대학서열체제를 토대로 한 학벌권력을 “특권계급의 이익이 국가 전체의 이익이라고 강변하는” 한국적 역진화를 떠받치는 핵심고리로 파악한다. “오늘날에는 극소수의 자본가에게 모든 권리와 권력이 집중되고 있는데, 일종의 마름들이라고 할까요? 관리계급이자 기생권력으로서 학벌권력이 그 아래에 있는 겁니다. 과거에는 국가권력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지권력에 기생해왔죠.”
정희진씨는 걸핏하면 국가나 국민, 과학의 이름으로 자신들만의 사적 이익을 정당화하는 권력자들의 간계를 간파하자고 외치며, 우석훈씨는 아파트 평수 늘리기 등 ‘10대의 보수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그것을 통해 집권한 한나라당 정권의 허구를 지적한다.
헌법에 대한 인식수준이 민주주의 수준과 정비례한다고 보는 김종철 연세대 교수는 헌법 공부와 실천을,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의 영향력 구조가 5 대 5는 돼야 세상이 바로 설 수 있다는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는 “동네신문, 지역 소식지, 개인 블로그, 온라인 카페 등 온·오프라인에서 한 명이나 다섯 명 정도가 의도적 혹은 비의도적으로 운영하는 아주 작은 규모의 언론” 곧 ‘실핏줄 언론’으로 역진화를 저지하자고 말한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는 시민들이 과학기술정책에 적극 참여하는 시민과학을 통한 더 큰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는 민주주의의 기본터전인 마을을 되살리자고 역설한다.
2010년 선거혁명을 꿈꾸는 박원순 변호사는 이런 세상 바꾸기, 곧 대한민국 역진화에 대한 저항의 주체는 깨어 있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 “바로 당신!”이라고 말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12연사의 ‘촛불시위’ 분석10대들이 먼저 느낀 ‘위험’
도매상 정부에 양질상품 주문
보수세력들 ‘배후론’으로 덧칠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는 지난해 이맘때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거꾸로 가는 우리 시대,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문제의식으로 기획됐고, 광주항쟁 30돌에 맞춰 출간됐다고 휴머니스트 쪽은 밝혔다. 지난해 11~12월 한 주에 두 차례씩 12명의 연사가 돌아가며 매회 100여명의 시민들을 상대로 한 강연과 질의 응답 내용을 4개월 동안 정리, 보완해서 묶었다. 꼬박 1년 만에 나온 이 책 출간 시기 는 2008년 5월에 거세게 타올랐던 ‘촛불시위’ 두 돌과도 거의 겹치는데, 보수신문은 촛불시위 2년 만에 난데없이 시위 동참자들을 등장시켜 마치 촛불시위가 특정 세력의 선동과 사주, 또는 인식의 오류 탓에 일어난 비자발적 우행인 양 몰아붙였고, 대통령이 나서서 그것을 ‘극찬’하는 기막힌 ‘앙상블’을 연출했다. 천안함 침몰 미스터리 와중에 지방선거를 앞두고 나온 이 해프닝에 부적절하게 동원당한 시위 참여자들의 반발과 해명이 뒤따랐지만 매체 독과점의 위력을 과신하는지, 연출자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12명의 연사들은 촛불시위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촛불시위 관련 부분을 발췌한다.
“촛불시위 때 왜 10대가 먼저 나왔습니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몇 달 되지 않아서 학교 분위기가 팍팍해지니까 애들이 가장 먼저 감지한 거예요. 교칙 적용이 엄격해지고, 0교시가 부활하고, 두발 단속이 심해지고, 야간자율학습이 강화되자 애들이 피곤을 느낀 겁니다.”(한홍구)
“촛불시위에 나온 시민들은 자신을 …글로벌 시장의 소비자로 생각했다고 봅니다. 이것이 10대 여성들, 젊은 주부들이 촛불시위를 주도한 이유이기도 하죠. 또한 촛불시위 참가자 중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에 투표했다는 사실도 해명되는 거죠. 이게 미스터리라고 생각했던 분들이 많잖아요? 자, 시장에 소고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양심 있는 도매상(이명박 정부)이라면 문제 있는 상품을 사 와서는 안 되고, 상품 상태를 속이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되죠. 이건 기본적인 경제적·자본주의적 사고가 없는 겁니다. 소비자들은 제발 정부가 도매상 역할을 제대로 하라고 호소한 것인데, 정부와 진보진영은 이를 반정부 시위로만 생각한 겁니다.”(정희진)
“그때가 …중간고사 직전이에요. 촛불 들고 나가려고 할 때 ‘너, 지금 나가면 낙오된단 말이야’ 하고 선생님이 말렸을 거예요. 제 상상으로는 아마 학생이 <여고괴담>에 나오는 것처럼 홱 돌아서면서 싸늘하게 ‘아직도 모르셨어요? 우리 이미 낙오한 거’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요.”(김상봉)
“최근 위험 연구자들은 보통사람들의 위험인식에 영향을 끼치는 열 가지 요소를 정리했습니다. 비자발성, 불평등성, 위험에서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이 발견되지 않을 때, 새로운 위험일 때, 인간이 만든 위험일 때, 감춰지고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일 때, 어린아이들이나 다음 세대에 지속되는 위험일 때, 두려운 것일 때, 과학자들이 그 내용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때,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등입니다. 이 요소들을 보면 우리가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대해 느꼈던 위험이 모두 해당된다는 걸 알 수 있고, 왜 사람들이 확률이 낮은데도 그 위험을 크게 받아들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홍성욱)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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