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불맛’
시집 ‘불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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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중남미 파타고니아의 야생에서 보았던 건 자유 혹은 씨앗. 그는 두 개의 말로 시를 쓴다. 한국어와 스페인어, 전혀 이질적인 두 언어 사이에서 그는 말과 국적의 경계를 ‘탈출’한다.

시인 구광렬(53·울산대 교수)씨. 그는 젊은 스물다섯 어름에 불현듯 중남미로 갔다. 멕시코의 인디오 마을에서 그들과 어우러져 목동이 되었다. 소를 치고 염소를 쳤다. 또한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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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3년, 그 땅에 파묻혀 살았다. 지금도 두 번의 방학을 비롯하여 1년의 반쯤은 지구 반바퀴 저편 땅에 머무른다. 문득, 그는 이제 중남미 시단의 유명 시인이 되었다. <팽팽한 줄 위를 걷기> 등 여섯 권의 스페인어 시집을 냈다. 시집 <텅 빈 거울>로 2005년 멕시코문협상을 받았으며, 올해엔 브라질에 본부를 둔 21세기 문학예술인연합회 문학상을 받았다.

구광렬씨의 새 시집 <불맛>(실천문학사)은 그의 네 번째 한국어 시집이다. 국내 시단에서 그는 ‘이질적인’ 존재인데, <불맛>의 시편들은 그가 단지 두 개의 말을 부리는 이중 언어 시인이라는 얘깃거리를 넘어 일정한 주목을 요하는 ‘한국어’ 시인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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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중 언어 글쓰기는 평론가 이성혁씨의 말대로, 그의 시편들에 ‘국제적 시야’를 부여한다. 고은 시인의 말을 따르면 그의 시는 “언어 관습을 넘어선 경계 탈출”이요, “인류적인 서사”이다. 시집 맨앞에 놓인 시편 <바오밥>은 그 국면을 유유히 드러낸다. “열대 아프리카의 나무가/ 온대의 내 가난한 정원에 뿌릴 내릴까 싶다가// 신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진 나무/ 수명이 오천 년이나 된다는 나무를 심는 일은/ 명주실 한 타래를 위해/ 끊어진 누에고치에 새삼 숨을 불어넣는 일과/ 깨져버린 꿈을 잇기 위해 삼가 눈을 감는 일/ 문드러져 사라져버린 지문을 다시 새기고/…// 무엇보다 뵌 적 없는 조상에게/ 엄숙히 제(祭)를 드리는 일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잠자는 이마에 듣는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오늘 그 바오밥나무 씨앗을 묻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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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씨앗,/ 찬바람 불고 눈 내리면 동동 얼어붙겠지만/ 지구의 온난화로 여름이 한 만 년쯤 될,/ 천 년 그 어느 끝자락 즈음/ 미이라 내장 속 과일 씨처럼 문득 싹을 틔워/…/ 지구별의 한복판을 뚫고 불쑥/ 반대편 이웃 정원의 나뭇가지로 솟아” 오르면, “지난날, 강 저쪽을 망각해/ 도강의 꿈을 저버렸던 새 한 마리/ 뿌리보다 더 뿌리 같은 가지 위에 앉아/ 그 평화스러운 나눔을 지긋이 바라볼 때// 그즈음/ 이 정원엔 눈이 내려도 좋을 것이다/ 씨앗을 쥐고 있던 내 손바닥, 화석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바오밥>)

이 시인의 ‘국제적인’ 시야는 뒤집어 보면, 한국 시들과의 이질성이랄 수 있겠다. 그의 눈은 지난 세기 초 뉴욕의 동물원에 원숭이처럼 전시되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콩고의 스물세 살 청년 오타 벵가를 기리는 시에선 이렇게 응시한다. “쾅!/ 뜻밖에도 자살이 아니네요/ 아(我)가 아중타(我中他)를 살해한 것이네요/ 아니, /아중타(我中他)의 공격에 아(我)가 정당방위한 것이네요.”(<뉴욕 브롱크스 동물원>)

구광렬씨는 울산 문수산 자락에서 고양이와 금붕어를 키우며 살고 있다.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중남미에 있을 때는 스페인어로 시가 나오고, 한국에 있을 때는 우리말로 시가 나온다”고 했다. 멕시코의 시인 사울 이바르고옌은 그의 시를 “완벽히 두 언어를 구사하는, 언어적 국경을 초월하는 지점에 있다”고 평한다.

그의 시편들은 때론 저 옛날 마야와 아스테카의 신화적 시공간을 통과하여 지구별의 남반구- 북반구 대척점을 불쑥 관통한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시편들이 독수리 머리에 흰 깃털을 한 케찰코아틀처럼 스르륵 날아올라 ‘파타고니아 고원의 산양 중 제일 망나니인 엘 카브론의 엉덩이에 차알싹 붙’었다가, 충북 단양의 ‘고수동굴 근처 크로마뇽녀의 쇄골을 스쳐’가기를 간절히 고대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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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의 비평가 베티 치스는 “첫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팽팽한 활시위처럼 절제된 구광렬의 시를 읽노라면 두 개의 문화가 교묘히 줄타기를 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고 적었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