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세상 뜬 자리 그의 시어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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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
오규원 지음/문학과지성사·6000원

날이미지시론 오규원 1주기 유고집시인을 시에서 끊임없이 지워나가고사물 하나하나에 주목한 집념 엿보여

오규원 시인(1941~2007)의 1주기(2일)에 맞추어 유고 시집 〈두두〉가 출간되었다. 시집 제목은 생전의 시인이 ‘날이미지시론’을 통해 설파했던 선가(禪家)의 말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에서 따왔다.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도이고 사물 하나하나가 전부 진리다’라는 뜻이다.

“가지에 걸려 있는 자기 그림자/ 주섬주섬 걷어내 몸에 붙이고/ 새 한 마리 날아가네/ 날개 없는 그림자 땅에 끌리네”(〈새와 날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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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한 포기와 나 사이/ 가을의// 돌/ 하나”(〈길과 길바닥〉 전문)

시집에 실린 50편의 시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29편이 ‘~와(과)~’를 매개로 두 개의 (대)명사를 병치시킨 형태의 제목을 달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시인이 비유와 상징보다는 인접성과 관계를 시작(詩作)의 원리로 삼고 있다는 방증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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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장악하고 그것을 시인 자신의 언어와 관념에 맞추어 조작하는 대신, 대상과 대상들 사이의 관계가 스스로 발언하도록 하려는 배려인 것이다.

일찍이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현상 실험〉)라거나 “욕망의 성기며 육체의/ 현실인 말은/ 오늘도”(〈말〉)라 노래했던 70, 80년대와는 확연히 달라진 면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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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몸이 열리면 거기 산이 있어 해가 솟아오르리라, 계곡의 물이 계곡을 더 깊게 하리라, 밤이 오고 별이 몸을 태워 아침을 맞이하리라”(〈그대와 산〉 전문)

‘서시’로서 시집 맨 앞에 배치된 이 시는 시로 쓴 ‘두두’ 시론이라 할 법하다. ‘그대 몸이 열리면’이라는 조건부사절을 ‘두두 시론에 입각해 시를 쓰면’으로 번역해 보면, 산이 있고 해가 솟고 계곡의 물이 흐르고 밤이 오고 별이 빛나며 아침이 오는 뭇 존재의 생성과 활동은 두두 시론이 가능케 한 존재의 백화제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시집에 ‘고요’라는 어휘와 고요의 묘사가 빈발한다든가 그림자와 그늘에 대한 언급이 자주 보이는 것을, 시인이 주체로서의 자신을 부단히 지우려는 노력으로 볼 수도 있겠다.


수록작 중 유일하게 ‘나’를 제목에 드러낸 작품이 말미에 실린 〈잣나무와 나〉인데, 이 작품에서만은 애써 억누르고 배제하고자 해 온 주체가 억압과 배제의 기제를 뚫고 제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것으로 보여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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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앞의 잣나무로 한 무리의 새가// 날아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래도 잣나무는 잣나무로 서 있고// 잣나무 앞에서 나는 피가 붉다// 발가락이 간지럽다// 뒷짐 진 손에 단추가 들어 있다// 내 앞에서 눈이 눈이 온다// 잣나무 앞에서 나는 몸이 따뜻하다// 잣나무 앞에서 나는 입이 있다”(〈잣나무와 나〉 전문)

주체의 억압과 귀환의 드라마라 할 이 장면이 인상적인 것은 ‘날이미지시론’ 이후 끊임없이 지우려 해 온 ‘자기’를 시인이 끝내 완벽하게 여의지는 못했다는 증거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는 결국 자기를 여의는 데 성공한 것일까. 제 자리를 허공에 맡기고 가지를 떠난 잎처럼?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나무와 허공〉 전문)

2일 오후 4시부터는 서울 남산 아래 드라마센터에서 시인의 1주기 추모를 겸한 출판 기념회가 열린다. 서울예술대학 동료 교수였던 소설가 최인훈씨가 ‘내가 만난 오규원 교수’라는 제목의 추모사를 하며, 최하연·황병승 등 제자 시인들이 스승의 유고 시를 읽는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학과지성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