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홑이불처럼 두툼한 종이 수백장이 빨랫줄에 기다랗게 걸려 있었다. 바람에 살랑이는 종이들이 햇볕을 받아 반들반들 윤이 났다.
지난달 20일 오전 전북 전주시 경원동 한지산업지원센터 뒷마당에서 만난 풍경이다. 건물 안쪽 작업장에선 김호석(65) 수묵화가가 직접 쑨 풀을 비닐봉지에서 꺼내 한지 위에 한장, 한장 바르고 있었다.
“물에 푼 찹쌀가루를 1년간 삭혀서 쑨 풀이에요. 한지 위에 보풀이 올라오는데 이렇게 하면 곰팡이나 세균들이 먹을 영양분이 제거돼 수백년을 둬도 종이가 그대롭니다. 또 보푸라기를 잠재워서 글씨가 번지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 말려서 도침(搗砧·두드려 다듬기)으로 기공까지 눌러주면 글씨가 번지지 않고 오래가는 전통한지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김 화가는 2015년부터 해마다 두번, 이틀 일정으로 이곳 한지산업지원센터를 찾는다. 정부포상증서(훈장·포장 및 대통령·국무총리 표창 용지)를 만드는 최종 과정인 도침작업을 직접 하기 위해서다. 도침작업은 한쪽을 풀칠한 뒤 말리고 반대쪽을 풀칠해 말리고, 두드린(200회가량) 뒤 말리고, 다시 두드려 말리는 순서로 진행된다. 지난해 정부포상지 3만5천여점 가운데 10%가량(3347점, 훈장·포장 전부와 대통령표창 일부)이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고 한다.

수묵화가가 그림이 아닌 한지 만드는 일에 나선 이유는 뭘까.
김 화가는 “어려서부터 수묵화를 그리면서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등 선조들의 그림은 하나같이 번짐이 없는데, 시중에 파는 한지는 왜 이렇게 번질까’라는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한지’란 게, 사실은 닥나무 20%에, 학생들 시험 답안지, 종이컵 등 폐지 80%를 섞은 ‘화선지’였다”며 “일본 화지의 ‘화’와 중국 선지의 ‘선’을 따서 만든 말인데, 지금도 많은 화가들이 이 화선지에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김 화가가 1973년 그린 ‘춘우정 순절투수도’도 10여년 만에 그림 속 얼굴들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이날 도침작업을 참관한 한윤희 명지대 문화재보존학과 겸임교수(제지공학 전공)는 “중국·일본 종이는 잘 번지지만 한지는 이와 달리 안 번지는 특징이 있다”며 “일본강점기 때 한지의 역할을 일본 ‘화지’가 대신하면서 전통한지 기술 전승이 사라지다시피 했고, 1970∼80년대 일본 상인들이 (한지가 특산품인) 전주 등지 한지공장들에 자신들의 방식대로 종이를 생산해줄 것을 대규모로 의뢰하면서 기록용 전통한지는 아예 자취를 감추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만 “한지가 무조건 화지·선지보다 우수하다는 건 아니다. 종이가 탄력 있고 고른 점은 화지의 장점이지만, 질기고 오래가는 점은 한지가 앞선다. 한지의 개성을 살리고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센터에서 김 화가를 도와 일하던 박신태(82)씨도 “아버지 때부터 한지를 만들었고, 17살 때 가업을 이어받으면서도 ‘붓이 잘 나가고 잘 번지게 하라’고 배웠지, 이렇게 안 번지는 한지를 만드는 건 보지 못했다. 닥(나무)을 100% 넣는 종이도 여기 와서 처음 봤다”고 말했다.
김 화가는 “40여년 전부터 기회 될 때마다 수소문해 전북 전주·임실 등지에서 종이를 사들이고, 궁중에 납품했던 노인 다섯분을 비롯해 50여명을 만나서 전통한지 만드는 과정을 듣고 기록했다”고 말했다.

이렇듯 어렵사리 제조 과정이 복원된 전통한지는 2015년부터 정부포상 용지로도 사용되고 있다.
박후근 행정안전부 상훈과장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수입산 닥과 펄프 혼합 기계 한지로 만든 양지에 먹과 잉크로 쓰면 정부포상 용지가 쉽게 손상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정부포상용지를 전통한지로 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행안부에 전통기술로 한지를 만들어 쓰는 화가가 있다며 김 화가가 추천됐다고 한다. 사실 김 화가도 질 낮은 정부포상증서 피해자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고조할아버지 춘우정 김영상(1836∼1911) 선생의 훈장증에 쓰인 사인펜 글씨가 수훈 10여년 만에 바랬다고 한다.
현재 행안부에 납품되는 전통한지는 ①3살 이하 닥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②그 껍질을 잿물로 삶은 뒤 ③삶은 닥나무 껍질을 흐르는 물에 1주일간 담가두고 ④방망이로 두드려 찧고 ⑤물에 풀어 발틀로 뜬 뒤 ⑥젖은 종이의 물기를 짜고 ⑦4장씩 겹쳐 말리고 ⑧매끄럽게 해 만든 ‘4합지’다. 수백년 동안 이상 없이 보관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직지심체요절’ 등에도 사용된 종이다. ①∼⑦ 과정은 공개입찰을 거쳐 선정된 4곳 공방에서 진행하고, ⑧번 과정은 김 화가가 직접 한단다. 이어 색상·두께·밀도·내절도·인장강도·피에이치(pH·산도) 등 8가지 행안부 규격 심사를 거친다. 3천번 이상 접었다 폈다 해도 끊김이 없어야 하며, 2천번 이상 당겨도 찢어져선 안 된다.
주변 만류에도 김 화가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노하우를 살짝 언급했다.
“콩대든 고춧대든 잿물 만드는 재료는 뭐든 상관없다. 천연 재료면 된다. 또 잿물 피에이치 농도가 10.4를 넘어야 닥나무 껍질이 제대로 삶아진다. 10.3에서는 10시간을 삶아도 안 삶아진다. 또 11.4가 넘으면 섬유가 손상된다. 이 때문에 12가 넘는 양잿물(표백제)을 쓰면 안 된다. 흐르는 물에 1주일 동안 담가두는 것도 중요하다. 잿물이 종이에 남지 않아야만 중성지(pH 7)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 교수도 “전통한지를 만든다는 지방의 한 작업장에 들어서니 표백제 냄새가 나더라. 표백제를 쓰면 종이에 갈색 반점이 생긴다(폭싱 현상). 또 남은 잿물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으면 종이가 열화되고 결국 바스러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흔히 ‘한지’라고 부르는 ‘화선지’가 바로 이런 산성지란다.

전통한지 복원에 어렵사리 성공하고, 안정적인 수요처도 생겼지만 아쉬움은 여전하다. 장당 2만원으로 일반 기계 한지 훈장용 종이값(장당 500원)에 견줘 40배나 비싸다는 이유로, 포상지 일부만 전통한지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김 화가는 “중국 명나라 문인 동기창(1555~1636년)과 근대화가인 장조화(1940~1986년) 등 중국 화가들도 조선종이를 애용했다”며 “그런데 정부나 미술계는 전통한지에 대한 이해가 없다. 화가들도 1천만원짜리 그림을 어떻게 500원짜리 종이에 그릴 수 있나. 문화재청도 문종이(창호지)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겠다면서도 기록용 전통한지 사용처를 넓혀가는 데는 무관심하다. 일본 강점기에 군사용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던 사람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할 정도”라고 말했다.
임현아 한지산업지원센터 연구개발실장은 “예산당국은 한지 단가가 높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부포상은 대대손손 물려주는 의미가 있고, 수공이 많이 들어가서 사실은 더 비싸야 한다”며 “납품자 중에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도 포함돼 있다. 이들에게 연금을 주는 것만큼이나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납품처를 확대하는 게 전통을 계승하는 데 중요한데, 이런 점이 간과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암수딴그루인 닥나무의 수나무가 사라질 위기여서 요즘 닥나무 식재에도 바쁘다는 김 화가가 말했다.
“모든 예술에서 재료의 발견은 혁명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미술 대학에선 중국·일본 안료로 화선지에 그림을 배우고 있다. 40여년째 그림을 그리면서도 제대로 된 종이 연구를 계속하는 이유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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