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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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 파티’라는 유행가 들어 보셨지요. 가수 김연자가 10년 전쯤 유행시킨 트로트풍 노래입니다. 전자음악 반주에 맞춰 “아모르 파티” 하며 반복되는 대목은 너무나 흥겹습니다. ‘아모르’(Amor)는 사랑한다는 뜻의 라틴말이고 노래 분위기로 보아서 신나게 파티를 즐기자는 뜻인가? 그런데 여기서 ‘파티’는 영어의 ‘party’가 아니고 라틴어 ‘fati’, 운명이란 뜻이니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지요. 독일 철학자 니체가 한 말인데 그는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여러 현자들이 이 현세와 인생이란 허무하고 의미가 없다며 혐오하거나, 여러 종교들에서 보이는 그저 내세만 바라보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고 죽음조차도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맞이하라 했습니다.

노래 아모르파티를 부른 가수 김연자. 사진 박종식 기자
노래 아모르파티를 부른 가수 김연자. 사진 박종식 기자

‘아모르 파티’의 노랫말을 지은이는 아마도 철학도였는지 가사 내용이 니체의 주장을 잘 소개하고 있지요.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 말해 뭐해 쏜 화살처럼 사랑도 지나갔지만/ 그 추억들 눈이 부시면서도 슬펐던 행복이여… 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다가올 사랑이 두렵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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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내 유년과 청춘 시절, 이 삶은 천년만년 지속될 것 같았지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삶에 끝이 있다는 걸 아예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나이 먹어 가면서 어느 순간엔가 이 삶에 끝이 있다는 걸 절절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몰려오는 허무감. 정정하던 아버지 하루아침에 쓰러지고 백발 어머니는 날로 아기가 되어 가겠지요. 의지하던 선배들 차례차례 떠나가고, 정겨웠던 친구들도, 아름다웠던 사랑도 쏜 화살처럼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그 추억들 눈이 부시면서도 슬펐던 행복’이라고, 그래서 ‘인생은 지금’이라고 신나는 뽕짝 리듬에 맞추어 노래합니다.

우리 삶이 유한하다고 애달파 하는 건 사실 자기를 너무 과대평가한 데서 비롯된 거지요. 이 유한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거야말로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인생은 지금’이라는 노랫말은 그냥 되는 대로 막 살자는 게 아니고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지금을 사랑하며 살라는 도사님 말씀인 거죠. 니체도 이 어려운 말씀을 얼떨결에 해 놓고는 그게 제대로 실천이 안되어서 결국은 정신줄을 놓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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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 크레타섬. 제주도 4배 크기로, 에개해에서 가장 큰 신화의 땅. 멀리 제우스의 탄생지라는 설산 이다산이 보인다. 사진 조현 기자
<희랍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 크레타섬. 제주도 4배 크기로, 에개해에서 가장 큰 신화의 땅. 멀리 제우스의 탄생지라는 설산 이다산이 보인다. 사진 조현 기자

‘희랍인 조르바’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학문으로 배운 건 많은데 현실 삶에 대한 통찰이 없는 백면서생 주인공이 탄광 사업을 하려고 고용한 일꾼이 조르바입니다. 조르바는 일자무식이지만 ‘아모르 파티’, ‘인생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소설을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제 스스로 백면서생임을 부끄러워하면서, 일자무식이지만 제 운명을 사랑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조르바를 이상향으로 그려냅니다. 소설 마지막은 산 위에서 캐낸 갈탄을 아래로 운반하기 위해 애써 만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쫄딱 망하는 걸로 끝이 납니다. 그래도 둘은 바닷가에서 신나게 희랍 춤을 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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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이렇게 세 문장이 적혀 있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고 그래서 자유로운 거죠. 반야심경에도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반야의 지혜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두려움이 없고 헛된 꿈에서 벗어나 열반의 자유를 누리느니라.”

사실 ‘아모르 파티’의 원조는 니체가 아니라 유대계 화란의 철학자 스피노자입니다. 그는 필연성을 가지는 모든 것은 신의 의지이므로 필연성에 대한 인식과 긍정은 바로 신에 대한 사랑이자 신의 의지에 대한 복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이런 지고한 상태를 ‘신에 대한 지적 사랑’(amor Dei intellectualis)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운명에 대한 사랑’(amor fati)이라고도 하지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이런 내용의 묘비명에 쓰여진 크레타섬의 키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소. 사진 조현 기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이런 내용의 묘비명에 쓰여진 크레타섬의 키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소. 사진 조현 기자

스피노자는 사람은 누구나 최대한 자기를 보존하려고 애쓴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다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사람은 감정과 이성의 두 단계까지 더 나가 있는 거죠. 감정은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을 속박하지만 이성은 세상과 자신을 잘 파악하여 감정을 규제하고 그 결과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합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모습 자체를 잘 파악하는 것, 이걸 어려운 말로 필연성에 대한 인식과 긍정이라고 한 건데, 이렇게 우리가 세상 정해진 이치를 잘 알아보는 게 바로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고 ‘운명에 대한 사랑’이란 거죠. 이 사랑을 통해 우리는 점점 더 높은 수준의 자유에 도달하게 된다고 합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자기보존 그 자체가 목표이고 이를 위해 열심히 환경에 적응되도록 진화를 거듭합니다. 이런 진화의 결과로 자기보존에 아주 유용한 도구인 ‘사유’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유(이성)는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 유한성, 상대성을 알게 되고 반대로 무한, 절대를 향해 머리 숙이는 거죠. 또한 나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남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 성찰도 생기는 거죠. 자기 유한성의 인식을 통한 무한으로의 초월. 이 초월로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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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도 같은 뜻의 말씀이 있지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크레스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화상. 사진 조현 기자
크레스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화상. 사진 조현 기자

스승님께서는 자신을 버리고 비워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으셨습니다. 이기심을 철저히 버리는 게 하느님과 이웃으로 향하는 진리임을 알고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되셨지요.

다시 스피노자로 돌아가면, 우리는 세계와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자기보존 욕구를 뛰어넘어 자유롭게 되는데 이걸 신의 의지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귀의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신에 대한 귀의 그 자체로 최고의 복이라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집 나간 아들이 아버지 집에 돌아오는 것 자체가 복이고, 돌아와서 아버지의 선물을 받는 게 복이 아니라는 거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현세에서 잘먹고 잘살다가 내세에 구원받겠다는 자기보존 욕구에서 벗어나 자기를 버리고 비울 일입니다. 그리하여 전체이신 하느님과 이웃에 귀의하면, 우리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늘나라 상급을 바람이 없이 지금 여기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야말로 그 자체로 최고의 복인 거죠.

그렇습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욕심은 우리를 속박하나니, “인생은 지금이야. 다가올 사랑이 두렵지 않아, 아모르 파티!”

글 김형태 변호사

*이 시리즈는 김형태 변호사가 발간하는 격월간 <공동선>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