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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글에서 삶의 차원들 가운데, 생존과 충만한 삶, 두 가지 차원을 이야기했다. 나머지 두가지 차원, 세번째와 네번째는 이렇다.

③ 차원 셋, 숭고한 삶

인간이 살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삶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삶의 추구에 숭고함을 두는 것이다. 꽤 높은 수준의 생존 기반을 갖추고도, 누구보다 자주 여행도 하고 유쾌한 사교 모임 몇 곳에 참여도 하고, 체계적으로 건강 관리까지 하면서 지내는데도 불현듯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거나 쓸쓸하다면, 그건 그 삶에 숭고함이 없다는 증거다. 숭고한 삶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물론 성웅 이순신 장군이나 도마 안중근 의사, 마더 테레사 수녀처럼 역사에 기록될 만큼 드높은 숭고함도 있다. 하지만 숭고함이 꼭 그렇게 드높을 필요는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지금 우리 곁에도 얼마든 드러나지 않게 숭고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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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금주의에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를 위해 내가 말하는 숭고함은 간단하다. 자기 삶 속에서 저마다 실천할 수 있는 숭고함을 그냥 실천하자는 것이다. 내가 요청하는 숭고란 ‘나를 위해 살면서도 그 삶으로 이웃과 생명을 일으켜 세우며 사는 삶’을 의미한다. 나를 위해 사는 삶으로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는 삶이란 도대체 어떻게 사는 삶이냐고 물어오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만 꽃처럼 살면 된다’라고 일러준다. 꽃은 누구를 위해 피는가? 잘 생각해 보라. 모든 꽃은 다 자기 자신을 위해 핀다. 그러나 어느 꽃도 자신만을 위해 피지 않는다. 꽃은 피었다 하면 반드시 누군가를 일으켜 세운다. 벌을, 나비를, 나방을, 파리를, 그리고 자신의 꽃과 인연이 닿는 무수한 벌레의 삶을 일으켜 세운다. 꽃은 그들에게 꽃가루나 꿀, 감로, 혹은 잠자리 등을 나누어 그들의 삶을 일으킨다. 심지어 우리 인간의 마음마저 환하게 밝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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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핀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라. 그 자리에서 은은한 빛이 느껴지지 않는가? 꽃이 핀 자리는 늘 환하다. 그 주변마저 환해진다. 꽃은 식물 각자의 근원에 이미 담겨 있었던 빛을 마침내 환하게 드러내는 자리(기관)이기 때문이다. 무심코 길을 걷다가 다음 발을 디디려던 자리에 민들레가 피워낸 노란 꽃이 빛나고 있는 것을 갑자기 알아채게 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아무렇지도 않게 그 꽃을 밟고 지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 환하디환한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안에도 식물이 피우는 꽃처럼 항상 터지기를 바라고 있는 맑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 예쁘게 접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 환한 자리가 그들이 밝히고 있는 환한 자리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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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삶은 그런 것이다. 모든 씨앗 안에 이미 꽃이 고이 접혀 있고, 그 꽃은 어떻게든 피어 주변을 환히 밝히는 것처럼, 우리가 숭고함을 추구한다는 것 역시 우리가 태어날 때 이미 장차 삶을 통해 발현되도록 마음속에 간직된 천부(天賦)의 사랑을 꽃처럼 피워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풀 한 포기가 자신의 꽃을 피우는 일이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는 일인 것처럼, 숭고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도 버겁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도 역경은 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숭고함을 추구하는 삶에 그들은 빨리 지치지도, 쉽게 포기하지도 않는다. 이는 마치 아픈 아이를 돌보는 엄마가 아무리 버겁고 고단해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과 같은 마음이요,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러하여 이들은 관대하고 자비로우며, 감각적 쾌감이나 심미적 쾌감을 넘는 정신적인 희열을 자주 느끼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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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차원 넷, 초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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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지만 이 차원에 오른 사람들이 있다. 대개 사람들은 이 차원을 사람으로서는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빗대지만, 인류 역사에는 더없이 성스러운 존재들이 기록돼 있다. 그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가없는 삶을 깨닫고, 인류 전체를 향해 마르지 않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이 살아볼 수 있는 삶의 최대치를 여러 형태의 표본으로 남긴 존재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흔히 그것을 우리 자신이라고 착각하여 믿으며 집착하는 모든 것을 넘어선 존재들이다.(자신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정체성의 예로는 자신의 직업이나 사업, 인간관계, 성장 환경, 생각, 감정, 신념, 의견, 가치관, 질병이나 장애, 나이나 성별, 물질적 대상 등을 들 수 있다. 더 깊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크 산체스·토멋 비에라, ‘에고로부터의 자유’, 샨티. 참조) 심지어 그들은 자신을 자신으로 한계 짓는 물리적 토대인 몸(신체)마저 넘어섬으로써 하늘을 닮은 사랑을 실천한 존재들이다. 당연히 자신은 물론 가족이나 민족을 넘어선 존재들이 되었고 시공마저 넘어선 존재가 되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위대한 스승으로, 혹은 신앙의 대상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이 차원에 들어선 이에게는 탐욕과 공포와 집착, 분노와 미움 같은 감정과 모든 어리석음이 사라지고 없게 된다고 한다. 드넓은 사랑으로 채워져 있는 이들의 마음은 그래서 오히려 영적 희열로 넘치게 된다.

그들은 평범한 우리가 붙들고 있는 온갖 분별이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은 존재들로, 그들의 인식에는 경계나 가장자리가 없다고 한다.(릭 헨슨 외, ‘붓다 브레인’, 불광출판사. 켄 윌버, ‘무경계’, 정신세계사. 참조) 그 반대 방향으로 사는 것으로 생존의 사수를 훈련받고 살아온 우리에게는 이 말이 너무 멀고 아득하게 들리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기억을 잘 떠올려보자. 나와 나 아닌 것, 그사이의 경계를 잠시만 허물어도 우리 마음에 그 이전엔 경험할 수 없었던 평화와 자유의 공간이 열리는 기쁨을 우리 역시 최소 한두 번은 경험했을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와 조건 없는 우정과 사랑을 깊게 나눌 때, 또는 내 것 네 것 가리지 않고 모두가 힘을 합쳐 어려운 일을 해결했을 때 초대 없이도 저절로 찾아왔던 그 뿌듯하고 행복했던 감정.

예수나 붓다가 삶의 여정에서 마침내 도달하게 된 그 차원을 나는 ‘초월’이라 이름한다. 이 차원은 인간으로서 살아볼 수 있는 최고 차원의 삶이다. 오직 연민과 자비,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 찬 드넓은 마음으로 자신과 이웃, 그리고 만물을 대할 수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가. 한가지 기억할 것은 인간 예수도 붓다도 모두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설령 우리 삶이 그들의 삶처럼 거룩할 수 있는 차원에 감히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차원의 삶을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최대한 가까이 가보려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초월에 육박한 삶을 목표로 삼는 일은 누구나 가능하고 또한 매우 보배로운 일일 것이다. 생각건대 그렇게 살고 죽음을 맞이한 이는 “충분히 살다 왔느냐?”는 질문을 아예 받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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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소중한 것들과 함께하기에만도 짧다. 소중하지 않은 것에 삶을 쏟기보다 소중한 것들과 함께하는 삶이 훨씬 좋은 삶이다. 우리가 정말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어디에 있는가? 주로 살아남기 위한 삶의 차원을 사는 사람은 맛볼 수 없는 기쁨이 저기, 충만한 삶의 차원과 숭고한 삶의 차원 구석구석에 보석처럼 놓여 있다. 삶의 차원을 확장하면 확장할수록 우리 삶은 진정 소중한 것들과 점점 가까워진다. 진정 소중한 것들의 정점에 무엇이 있을까?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랑이다. 이제 숲이 가르치는 가장 소중한 이야기, ‘사랑’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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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또 사랑하며

이제 죽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 받게 될 두 번째 질문을 마주해 보자. 앞의 글에서 비워두었던 ( ) 안의 동사는 ‘loved’이다. Have you loved enough? 너는 충분히 사랑하고 왔느냐? 내가 떠올려 놓고도 참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저 질문을 받았다면 당신은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예?, 아니오?

지금 바로 숲이 전하는 사랑의 말을 들어보자 하자. 삶을 노래하며 사는 저 흔한 나무와 풀과 온갖 생명들이 보여주는 사랑은 복잡한 것 없고 지극히 간명하다.

사랑의 출발점

우선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모든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온전히 타인을 사랑한다는 일은 거짓이다. 그렇다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 삶이 아무리 버거워도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며 도망치지 않는 것이다. 숲을 보자. 숲에서는 삶이 아무리 고되고 버거울지라도 저 자신을 내던지고 자기로부터 멀어지거나 도망치는 생명이 아무도 없다. 자신의 길을 위협하거나 막아서는 숲 생태계의 환경 요소는 다양하고 비일비재하다. 어떤 때는 긴 가뭄이나 폭우가, 다른 어떤 때는 태풍이나 폭설, 또는 때 이른 서리나 우박 등 변덕스러운 날씨가 삶을 휘청이게 한다.

자기를 사랑할 수 있을 때…

기상과 관계된 환경만이 아니다. 열심히 이뤄낸 몸의 일부 또는 전부를 잃게 하는 방해 요인들도 넘쳐난다.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뒤로 끄집어 당기는 온갖 간섭(disturbance)이 삶을 향해 수시로 찾아온다. 자기 몸이 직접적으로 해를 당하는 때도 있고, 자신이 발 딛고 사는 주변의 서식공간이 무너지거나 급격하게 변화되는 때도 있다. 이런 직·간접적인 외부 간섭은 그들의 삶을 뒤흔들어놓는다. 예컨대 대부분 나무와 풀은 자신의 이파리와 열매와 줄기와 나뭇가지 등을 뜯어 먹히며 산다. 어렵게 이뤄가고 있는 소중한 삶을 수많은 곤충과 그 애벌레, 또는 미생물들에게 수시로 내줘야 하는 것이다. 근처에 있는 나무나 풀을 찬찬히 보시라. 그들 몸에 당신에게 새겨진 상처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자욱할 것이다. 우리는 도망치고 싶었을, 그래서 때때로 도망치기도 했을 그럴 때도 그들은 자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살아왔음을 알아채게 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사랑의 출발은 자신으로부터 멀어지지도 도망치지도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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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와락 껴안는 것

다음으로 사랑은 와락 끌어안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대단히 수동적인 의미로 해석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에는 사실 대단한 능동이 담겨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존재의 삶에는 반드시 역경이 작용한다. 누차 강조했듯이 이 역경의 뿌리는 그의 서식지에 놓인 결핍과 과잉의 환경 때문이다. 형태만 다를 뿐, 모든 자리가 그러하니 이 지점을 억울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태극의 로고스요, 삶의 로고스이기 때문이다. 도망치지 않는다는 의미는 그 역경을 가만히 겪어내기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부여된 역경을 와락 껴안아 그것을 넘어선다는 아름답고 절묘한 능동이 담겨 있는 의미다.

모든 존재의 삶에는 상처가 있다. 그리고 상처를 준 가해자도 있기 마련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에도 마찬가지 상처가 있고, 그래서 가해자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얽히고설키지 않고는 세계가 이뤄지지도, 돌아가지도 않게 생겨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으로부터 유리된 사람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가해자에 대한 원망을 붙들고 살지 않는다. 반대로 자기 삶의 지금에 대한 책임을 가해자에게 전가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직 자기의 삶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보라! 자신을 댕강 잘라버린 누군가를 또는 그 무엇인가를 원망하느라, 잘려 나간 그 지점에 그대로 붙들려 있는 풀이 어디 있는가!! 가해자에게 집착하거나, 자신을 책망하거나 죄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스스로 불행해 지는 길이자 나를 있게 한 더 큰 존재가 보기에도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사랑은 그 눈물겨운 지점을 와락 껴안는 것이다. 껴안고 넘어서는 것이다.

살리고 밝히는 것

그 눈물겨운 포월(包越)을 통해 사랑은 마침내 살리고 밝히는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다시 보라! 온갖 역경 다 넘고 꽃이 핀다. 꽃이 핀 자리는 자리마다 다 환하다.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마저 살아나고 환해진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은 살리는 것이고 밝히는 것이다.

숲의 말로 나 자신과 또 인연 닿는 이를 살리고 밝혀 보려 시작한 글이었지만, 어땠을진 모르겠다. 아주 작고 미약한 향기의 꽃이라도 피기만 하면 어느 귀퉁이 정도는 꼭 환하게 하는 걸 보았으니, 다만 스스로 위로한다.

연재와 함께 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어눌하더라도 숲의 말로 살리고 밝혀 보라, 귀한 연재 공간을 할애해 주신 조현의 휴심정과 대우재단에 감사드린다.

김용규(충북 괴산, 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