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아시스>의 한 장면. 사진 <한겨레> 자료
영화 <오아시스>의 한 장면. 사진 <한겨레> 자료

‘오아시스’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머리가 좀 모자라는 전과 3범 남자와 뇌성마비 여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청준의 소설 제목처럼 ‘병신과 머저리’ 둘이 만났으니 그들의 앞날이 사막처럼 막막할 것은 뻔합니다. 손목이 제멋대로 오그라지고 입도 삐뚤어지고 눈동자도 이리저리 몰리는 여자의 모습은 너무나 끔찍했지요. 그래서 20년 전 영화관에서 볼 때는 제대로 몰입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이제 나이 먹고 철이 좀 들었는지 영화가 제대로 보이더군요. ‘머저리’ 남자는 형 대신 감옥살이를 했는데도 어머니로부터까지 미움을 받고 여자 오빠는 동생 장애를 이용해서 제 잇속을 차립니다. 급기야 남자는 여자를 강간했다는 누명을 쓰고 또다시 감옥에 가게 되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변호사라는 직업의식이 발동해서 열불이 났습니다. 남자가 극심한 구박을 무릅쓰고 여자를 휠체어에 태우고 어머니 생일 모임에 갔던 일이 있거든요. 이 사실을 증명하면 강간 혐의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것 아닌가?

저건 말이 안되는 상황이라고 분통을 터뜨렸지만 어디 영화 속에서만 그런가요. 내가 변호했던 재판에서 누명이 벗겨진 경우도 있었지만 끝내 수십년 감옥살이에 처해진 억울한 이들도 여럿 있었으니까요. 인혁당 사건은 비록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오래전 이미 사형집행이 끝난 여덟 분의 삶은 어찌 돌이킬 수 있겠나요. 그렇습니다. 우리네 삶 자체가 부조리한 일들의 연속이요. 억울한 일들의 반복입니다. 저 남녀 주인공들이 머리가 모자라게 타고나고 손발이 뒤틀리고 입이 돌아간 채 세상에 나온 것 자체가 부조리하고 억울한 일인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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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 속 ‘병신과 머저리’들은 내 선생님입니다. 그들은 억울하고 부조리한 일들이 닥쳐도 절망하지 않고 이런 상황을 넘어섭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내가 왜 이런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하냐고 하소연하지 않고, 아니 억울함 자체를 느끼지도 못한 채 그냥 사랑의 편지를 씁니다. “공주마마, 나는 여기서 밥도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나중에 우리 다시 만나면 내가 공주님 잘 모실게요.” 그리고 여자는 오그라든 손과 발로 엉기적거리며 먼지 풀풀 나는 방을 쓸면서 남자를 기다립니다.

나는 세상 부조리와 불의에 화내고 하느님 원망하고 절망해서 기진맥진하지만, 그들은 이런 주어진 운명을 넘어서서 상대방의 모자람을 끌어안고 그저 씩씩하게 사랑을 할 뿐입니다. 이게 바로 막막한 사막의 ‘오아시스’인 거죠.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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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 교수. 조현 기자
길희성 교수. 조현 기자

얼마 전 길희성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종교학자이자 크리스천으로서 서울대 철학과에서 강의하다가 김승혜 수녀님과 함께 서강대 종교학과를 창설하고 가르치신 분입니다. 10년여 세월 불교, 개신교, 가톨릭, 유교, 원불교 학자 종교인들과 함께 모여 서로의 신앙을 공부하고 토론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화>라는 책을 내기도 했지요.

정년퇴직 후에는 강화섬에서 도(道)를 찾는(尋) 공부방이란 뜻의 ‘심도학사’를 만들어 종교 간 대화를 계속하셨습니다. 말년에 당신 평생 공부 결과를 모아 <영적 휴머니즘>이란 책을 쓰셨지요. 900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지만 한 100쪽 정도로 요약할 수 있지 싶더군요. 더 짧게 요약하면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세상만사는 하느님이 성육신(成肉身)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넓게 보아 어느 종교도 다 수긍할 수 있는 말씀인데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특히 개신교에서는 이단이라고 난리가 날 표현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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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선생님은 하느님에서 출발한 이 세상에 왜 이다지도 악과 부조리가 끊이질 않는 것인지에 대해 여러 종교와 철학 사조가 해명하고 있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하느님이 악에 대해 책임이 있느냐를 따져 보는 걸 변신론(辯神論)이라 하지요. 영지주의나 마니교에서는 선과 악을 대등한 위치에 놓고 악은 신(神)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악이란 선의 결핍일 뿐이라 합니다. 길 선생님은 이 견해에 동의하면서 이 세상에서는 선의 결핍인 악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나 나중에 하느님께서 해결해 주실 거라면서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하느님이 계시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칸트의 이야기와 비슷하지요. 조금 길게 인용해 봅니다.

“설사 내가 아주 용감하게 신 없는 세계에서 정의를 위해 나의 삶을 바친다 해도 도도하게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끼어 죽고 깔려 죽은 무수한 억울한 인생의 복권은 영영 없을 것이며, 나 역시 허무하게 삶을 마칠 것이 뻔한데, 당신은 그런 부조리한 것이 정말로 우리가 사는 인생이고 역사와 세계의 실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룰 수 없는 정의를 위해 당신의 삶을 바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정말로 당신을 존경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나는 그렇게 못할 것 같다. 나는 무슨 이념이고 가치고 하는 골치 아픈 것들은 집어치우고 슬슬 눈치나 보면서 편하게 살다 갈 테니까.” 평생 도를 추구해 온 수도자의, 위선이나 가식 없는 솔직한 표현이라 여겨집니다.

인천광역시 강화도 심도학사에서 프로그램 참석자들과 참선 중인 길희성 교수(사진 맨 왼쪽). 사진 조현 기자
인천광역시 강화도 심도학사에서 프로그램 참석자들과 참선 중인 길희성 교수(사진 맨 왼쪽). 사진 조현 기자

얼핏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방종한 생활로 모든 걸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아버지가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 주는 걸 보고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불평하지요. ‘저는 아버지를 종처럼 섬기며 명을 잘 따랐는데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루카 15, 11-32)

결국 이 아들은 염소 한 마리 바라고 아버지를 섬기고 명을 따랐다는 거네요. 하지만 아들은 아들로서 당연히 아버지를 섬기는 거고, 그래서 예수님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의 본분에 대해 이리 가르치셨지요.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루카 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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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르침과는 다르게, 나중에 악과 부조리가 해결되지 않는 세상이라면 골치 아픈 정의니 하는 이념들은 걷어치우고 슬슬 눈치나 보면서 살겠다는 길 선생님 말씀은 이 부조리와 억울함, 불의가 만연하는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바로 잡아주십사 하는 간절한 바람을 반어법으로 강조하신 게지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부조리’니 ‘삶의 의미’니 ‘억울함’이니 하는 생각들은 다 이 유한한 개체 ‘나’를 감히 세상의 중심인 양 여기는 데서 비롯된 것이고 ‘악’이란 개념 역시 나만 위하는 이기심의 다른 말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세상에 왜 악을 내셨냐고 한탄하는 건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들이 할 소리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정의를 바로 세우고 부조리를 없애려 애쓰고 나서는 염소나 송아지도 바라지 말고 그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할 일입니다.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는 게 바로 사랑입니다.

영화 ‘오아시스’의 바보들은 그렇게 해서 막막한 이 세상에 오아시스를 만들었습니다.

글 김형태 공동선 발행인 및 변호사

***이 시리즈는 김형태 변호사가 발행하는 격월간 <공동선>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