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도 천일염.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영종도 천일염.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코로나와 함께 미세먼지 주의보가 일상화되었다. 낮에는 KF95가 찍힌 마스크로 해결하고 저녁이면 소금물로 코와 입안을 헹궈내는 일로 하루를 마감한다. 코로나가 해제되더라도 미세먼지 때문에 소금물 생활은 계속될 것 같다. 한동안 청주 도반스님 절에서 얻어 온 죽염수를 이용했다. 큰 생수병에 담았는데 정제를 했는지 맑은 물과 다름없이 투명하다. 농도도 여간 진한 게 아니다. 사용할 때마다 맹물을 섞어 적당하게 희석해야 했다.

죽염은 대나무 속에 천일염을 넣고 황토로 입구를 막은 뒤 소나무 장작불로 가마에서 몇 번을 반복하여 구워내는 가공소금이다. 오래전부터 절집에서는 구운소금을 만들어 사용해왔다. 가정집에서도 살림 잘하는 이는 간수 뺀 소금을 프라이팬에 볶아 약간 단맛이 도는 소금으로 음식의 간을 맞추기도 했다. 요즈음은 자기 브랜드를 내걸고 상품화되어 누구나 별다른 수고로움 없이 죽염과 구운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방송>의 차마고도. 한국방송 제공
<한국방송>의 차마고도. 한국방송 제공

소금은 종류도 많다. 육지에서 광석을 채취하듯 소금 덩어리를 캐내는 것을 암염이라고 한다. 하긴 소금이 광물에서 식품으로 분류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는 시기의 일이라고 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옛날에는 소금이 국가의 전매사업이었으니 얼마나 중요한 물품으로 취급했는지 알 수 있다. 한때는 군인의 월급을 소금으로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솔저(soldier)라고 불렀다. 후에 월급쟁이를 샐러리 맨(salaly man)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두 소금(salt)이란 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글자 그대로 작은 금(小金)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금일봉’이란 말은 소금 한 봉지를 의미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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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에서 2007년도 6부작으로 제작된 ‘차마고도’에도 소금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가축을 길들일 때 소금을 먹이로 사용했다. 그 소금은 우물에서 소금물을 퍼 올려 소금밭에서 증발시킨 것이었다. 땅속에 있는 암염이 녹아서 지하수맥을 따라 흐르다가 우물로 모인 것이다. 소금물 푸는 것부터 증발시키는 그 힘든 과정을 전부 여성의 힘으로 해결하는 소수민족의 삶의 단편을 엿볼 수 있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소금이라면 당연히 바닷물에서 나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광산이나 우물에서 소금이 나온다는 것을 매스컴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현대 지질학자들에 의해 육지의 소금도 본래 바다에 있던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바다 밑의 땅이 화산이나 지진으로 지각변동을 일으키면서 솟아올랐고, 그때 갇혔던 바닷물이 차츰차츰 증발하면서 소금만 남겨 두었다는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암염광산이나 소금우물 혹은 소금호수가 있는 육지는 한때 바다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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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날 전남 신안군 증도에 있는 대형염전에 들렀다. 장성의 작은 암자에 있는 스님이 서울에 머물고 있는 수도승 몇 명을 봄바람이나 쐬자면서 데리고 간 곳이다. 겨우내 얼어있던 염전의 밭두둑을 손질하면서 물 빠진 바닥도 논바닥처럼 평평하게 다듬고 있었다. 본래 소규모 염전이 있었는데 1953년 전(前)증도와 후(後)증도를 연결하는 제방을 완성함으로써 국내 최대 단일 염전을 조성할 수 있었다. 전쟁 직후라 피난 와서 일할 사람도 많았고 소금값도 괜찮았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산 수입소금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경영난에 봉착했다. 1985년 (고) 손말철 선생이 인수한 후 140만평 염전은 또 다른 계기를 맞게 되었다. 염전 주변의 환경을 청정하게 유지하면서 아예 ‘토판(土板 흙바닥)천일염’으로 특화하여 전통소금제작 방식을 고수한 덕분에 뒷날 ‘소금장인’까지 배출하는 명문가가 되었다.

고창 선운사. &lt;한겨레&gt; 자료사진
고창 선운사. <한겨레> 자료사진

나무로 만든 소금 창고 수십 채, 소금 만드는 이들이 머물던 숙소 수십 채, 소금을 옮기는 수많은 수레, 수레길을 따라 놓인 레일 그리고 길 끝까지 이어진 전봇대의 행렬, 양옆으로 펼쳐진 염전, 염전 안으로 소금을 이동하기 위하여 길게 뻗은 길을 겸한 다리 구조물 등이 현재도 그대로 살아있는 삶의 현장이다. 주변에 서걱거리는 마른 갈대가 운치를 더해준다. 나무 소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심지에 있다면 바로 카페로 바꾸어도 엄청 인기가 있을 것 같은 흉내 낼 수 없는 땀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있고 투박한 나무로 이어진 소박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소금 창고마다 전부 빠지지 않고 일련번호가 붙어있는 거로 봐서 그 자체가 관리대상임을 알게 해준다. 이렇게 하드웨어는 물론 소프트웨어까지 함께 갖춘 가치를 인정받아 염전은 근대문화유산 360호, 석조 소금 창고는 근대문화유산 361호, 2016년 국가주요어업유산, 2018년 국가유형문화재 134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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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변산반도 줄포 인근도 긴 역사를 지닌 염전이 있다. 부안 개암사에는 죽염제조법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고창 선운사(禪雲寺)에는 유명한 소금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백제 위덕왕 시절인 577년에 이 사찰이 창건된다. 큰 절을 지으려고 하면 넓고 양명한 명당이 첫 번째 조건이다. 문제는 그런 좋은 자리에는 이미 주민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창건주인 검단(黔丹. 黔검을 검)선사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단순이주가 아니라 생계까지 해결해야 하는 큰일이었다. 고심 끝에 묘안을 찾아냈다. 산골의 비탈논밭 대신 바닷가의 넓은 소금밭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당나라 유학 시절에 익혔던 그리고 당시로써는 최첨단기술인 소금제조법을 주민들에게 전수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서로 윈윈하는 해결책으로 사찰도 건립하면서 주민의 행복권도 보장하는 대안의 모범사례를 제시한 것이다. 이후 주민들은 매년 첫 소금을 수확하면 사찰에 소금을 공양미처럼 올렸다. 이 ‘보은염(報恩鹽)’의 역사가 벌써 천오백년이다.

소금이 흔한 시대가 되었다. 물이나 공기처럼 너무 흔해서 귀한 줄 모르고 살아간다. 당사자인 소금은 ‘작은 금’으로 제대로 대접을 받던 지난 시절을 생각하며 “아~ 옛날이여!” 라는 대중가요 한자락을 읊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 원철 스님(불교사회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