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티비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갈무리
<제이티비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갈무리

새벽부터 친구들이 카톡을 보내옵니다. 꽃이 있는 사진도 보내고 “우리가 기다리는 내일은 언제나 내일로 달아날 뿐이니 ‘지금 여기’를 살자” 같은 글귀도 따라옵니다. 수시로 이걸 지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잘나가던 시절 녀석들이나 나나 제가 세상을 좌지우지한다 여겼더랬지요. ‘삶의 기쁨, 삶의 의미가 다 내 것이로세.’ 그런데 다들 일손을 놓을 나이가 되니 왕년의 높은 직책이며 돈 잘 벌던 시절은 간 곳이 없고 큰소리치던 집에서도 마누라며 자식들 눈치보기 바쁜 초라한 신세가 된 겁니다. 그저 외롭습니다. 그 자식들도 아비들과 똑같은 길을 걸어가겠지요.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짝 잡으려 애쓰고, 애 낳으면 열심히 돈 벌어 잘 가르치려고 분골쇄신하지만 곧 그 아비처럼 뒷방 늙은이가 될 테고, 그 자식들이 애지중지하는 손주 역시 할비, 아비가 죽어라 돌린 다람쥐 쳇바퀴를 또 돌리고 있겠지요.

오늘 아침에는 담장 너머에서 고양이 두 마리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울어대더군요. 발정기가 되어서 새끼를 치려고 저러는 거겠지요. 아이고, 너희들도 불쌍한 중생이로고. 고양이는 10년 넘게 사는 게 정상인데 저 길고양이들은 채 2~3년을 못 넘긴다는군요.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마당에 똥 싸다가 나한테 쫓기고. 가련한 제 신세를 그대로 물려줄 게 뻔한데 무얼 하러 저리도 새끼 가지려 안달인고.

그래서 열일곱 살짜리 벵까따라만은 어느 날 문득 학교도 때려치우고 단돈 3루피를 들고 집을 떠났답니다. 변호사 아버지를 둔 유복한 브라만 계급이었던 그는 평소 힌두신 미나시끄를 모신 사원에 자주 갔었습니다. ‘나에게서 이 개체가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자 이 개체와의 연결에서 벗어나 닻을 내릴 새로운 정박지를 찾게 되었다. 그래서 계속 사원을 찾아갔고 때로 눈물이 흐르면 걷잡을 수 없었다. 전능하신 이스와라 신의 은총이 나에게 내려와 그에 대한 나의 헌신은 더욱 깊어지고 그냥 고요히 앉아서 내 내면의 깊은 그것이 초월자의 깊은 그것으로 흘러들도록 내버려두는 때가 많았다.’ 그러네요. 그도 천주교 신자들처럼 하느님을 뵈어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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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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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집 떠나면서 쪽지 하나를 남겼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저는 지금 아버지를 찾아 이곳을 떠납니다.” 처음에는 “저”라고 표현했지만 뒷 문장에서는 자신을 “이것”으로 지칭합니다. “이것이 지금 하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아무도 슬퍼하실 필요가 없고 이것을 찾기 위해 돈을 허비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 열두 살 적 같습니다. 성전에 머무느라 부모를 안 따라간 소년에게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이렇게 대답하셨다는 것이죠.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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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쪽지 마지막 이름 쓸 자리에다 “벤까따라만” 대신에 그냥 줄만 그어 놓았다는 거죠. 이미 서명을 할 “나”가 남아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는 신이 머문다는 아루나찰라 산으로 가 평생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했습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 있는 참나(眞我)에 머무르면 아무 데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지복(至福)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지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장 31-32절)

나나 매일 새벽 카톡 문자를 보내오는 친구들이나 다들 가지가지 굴레에 매여 자유롭지 못합니다. 외모나 능력이 남만 못한 게 굴레요, 돈, 명예, 권력, 자존심이 굴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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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체이신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와 한 개체가 되는 순간 유한성과 이기심, 무지의 한계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유한한 우리는 반드시 죽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하늘나라 가서 근심 걱정 다 내려놓고 잘 지낼 거라고 위안 삼아 이야기들 하지만, 부활이나 구원은 이 개체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나’라는 개체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계속되는 건 아니겠지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초한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 신부님은 <그리스도교 신앙입문>이란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부활을 우리가 경험하는 삶과 시간적 존재로 복귀하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된다. 영원이란 결코 우리의 시간적, 생물학적으로 살아온 시간의 후에 이 시간이 계속된다는 것이 아니다. 영원이란 시간에서 해방되었다는 데서 시간을 지양(止揚)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인격과 관심사의 존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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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티비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갈무리

우리는 또한 개체의 보존 욕구인 “나”를 위하는 마음, 이기심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사실 이기심이 없으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쌀이며 고기 같은 남의 생명을 먹어야 내가 살고 내 새끼가 삽니다. 다른 종,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기심은 나를 얽어매는 굴레 중의 굴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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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는 전체이신 당신과, 그 피조물인 이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당신을 그저 내 행복과 내세를 보장해주는 도구라고 여깁니다. 삼라만상이 다 당신 드러남임을 모르고 나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무지 속에 허덕입니다. 기후위기에 이 세대가 가기 전에 세상이 망가질지도 모르는데도 사람들은 커피 한잔 마시는 데 캔 하나 컵 하나를 버립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무지에 빠지기도 합니다.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국민의 민주적 의사 결정권입니다. 그런데 사회 유지의 아주 일부 기능에 불과한 범죄 처벌을 이유로 국민의 대리인인 대통령의 인사권이나 국회의 입법권을 마구 훼손시키기도 하고, 이에 환호하는 어리석음에 힘입어 나라 전체의 앞날이 좌우되기도 합니다.

아루나찰라로 간 벤까따라만을 사람들은 라마나 마하리쉬라는 존칭으로 불렀습니다. 그는 개체 ‘나’가 그저 잠시 동안 유지되는 환상임을 알고, 이 유한성과 이기심, 무지의 굴레에 매여 있는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신 참나이신 하느님을 알면 이 세상을 살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 마지막 부분을 보았습니다. 저마다 배경이 다른 네 명의 남녀가 모여 자신을 옭아매는 게 무언지 이야기를 나누고 거기서 해방되는 길이 무언지를 일기에 적는 내용인데 마하리쉬 선생님이나 라너 신부님보다 더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를 끌어가더군요.

그렇습니다. 세상의 여러 가르침은 다 같아요. 이 개체들은 ‘전체’에서 비롯된 거고 우리의 여러 굴레는 다 이 개체라는 허상에서 비롯한 것이니 다른 개체들과의 분별을 벗어던지고 전체에 귀의하라.

한마디로 서로 사랑하라는 거겠지요.

글 김형태/변호사·<공동선> 발행인

*이 글은 김형태 변호사가 발행하는 격월간 <공동선>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