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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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일입니다. 새벽 세시에 전화벨이 계속 울려댔습니다. 불길한 예감에 전화를 받았더니 아들 녀석이 술에 취해 높은 데서 떨어져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있다는 거였습니다. 자꾸 구역질이 나와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더군요. 여동생이 모는 차를 타고 병원에 가는 동안 절규가 절로 나왔습니다. ‘하느님 제발 우리 아들 좀 살려 주세요. 그리해 주시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오늘도 이렇게 묻습니다. 아마 인류가 출현함과 동시에 이 물음이 시작되었겠지요. 무섭게 벼락치고 홍수가 나서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을 때, 역병이 돌아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이 죽어 나갈 때, 다른 부족들이 쳐들어와 모조리 도륙하고 빼앗아 갈 때 저절로 이런 하소연이 튀어나왔을 겁니다. ‘아니고, 하느님, 나 좀 살려 주세요, 다시는 못된 짓 안 하고 하느님께 열심히 제사 받들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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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이집트며 가나안, 바빌론등 이민족을 쳐 없애고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 주시는 하느님.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용케 전쟁이나, 역병, 사고, 굶주림을 피하더라도 결국엔 다 늙어 죽게 되지요. 그래서 죽음에서 나를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이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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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누구신가요. 나와 세상이 구별 안 되고 그저 본능적으로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살아가던 시기를 지나서, ‘나’를 인식할 줄 알 만큼 지능이 진화하면서‘나를 돌보아 주는 분’으로서의 하느님이 필요하게 되었고 지금도 우리네 종교적 삶의 대부분에서 이런 하느님을 모시고 삽니다. 그리고 이‘나’가 우리로 확대되어 가면서 하느님은 나, 우리 가족, 우리나라, 우리 종교, 우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 주는 절대 권능자입니다. 당연한 결과로 나와 우리가 아닌 저들을 벌주십사 우리의 하느님께 빕니다.

그런데 무슬림들도 기독교가 믿는 유일신 하느님을 같이 믿고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를 마호메트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예언자로 받들어 모시는 데 지금까지도 중동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유일신 하느님은 누구 편을 드셔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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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수많은 ‘나’들은 저마다 생김새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속해 있는 집단의 문화도 다르고 서로 이해관계가 대립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저마다 다른 사람들과 집단이 다들 저를 보호하는 하느님을 상정하면 그 하느님은 그저 부족신에 불과할 겁니다. 하느님은 이 저마다 다른 모든 이들의 하느님이어야 정말 하느님이겠지요.

이제 사람의 마음이 점점 진화해서 단순히 ‘나’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나 말고 다른 존재들도 나와 똑같이 자기보존 본능을 지닌, 그리고 나와는 전혀 다른 이해관계와 생각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되면서 우리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내가 저들 때문에 괴로우면 저들도 나, 우리 때문에 괴로울 수 있겠구나.’ 이렇게 반성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능력. 이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나’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고 나를 뛰어넘은 바로 그곳에 계시는 전체이신 하느님을 알아 모실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너에게 해 주길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논어에도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평생동안 실천해야 할 한마디 말이 있습니까?”“그것은 바로 ‘서(恕)’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曰, 其恕乎. 己所不欲勿施於人.) 여기서‘서(恕)’란 헤아림, 용서, 동정심을 뜻합니다. 자기주장, 자기 이익만 챙기지 말고 남을 헤아리고 용서하고 동정심을 가지는 게 평생 실천할 한마디 말이란 겁니다.

예수님의 사랑, 공자님의“서(恕)”가 바로 하느님이라고 나는 알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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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나의 상대가 되는 또 하나의 어떤‘존재’에 불과할 리 없습니다. 말로는 어쩔 수 없이‘하느님, 여호와, 유일신 알라, 브라만’하고 이름 붙일 수 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그 분은 존재와 비존재를 넘어선 분(“분”이란 말도 역시 존재를 지칭하니 어쩌나?)입니다. 그래서 뭐라 뭐라 이름을 붙이는 순간 자칫 우리는 그 이름에 매여 그 분을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에 나오는 수염 하얀 마음 넓은 할아버지, 혹은 우리의 잘잘못을 가려 상 주고 벌주는 심판자, 세상 돌아가는 걸 일일이 간섭하고 규율하는 막강한 힘을 지닌 절대자, 그래서 당신께 열심히 비는 자들의 편을 들어 주는 보호자로 착각하고 맙니다.

내가 아는 어떤 스님도 성경에 나오는 ‘유일신 여호와’라는 말에 매여서, 기독교를 아직 유아기를 못 벗어난 종교라고 폄하하더군요. 하지만 금강경도 부처님 깨닫고 가르치신 법은 말이나 개념으로 파악할 수도 설할 수도 없다면서 역시 말과 개념을 사용해서 법을 이리저리 설하고 있거든요. 그 스님도 기독교의 말이나 은유에 매여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거죠. 마치 기독교인들이 불교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나와 세상은 모두 서로 기대어 생겨난 것이라는 연기법(緣起法). 초기 불교의 이 부처님 가르침도 반야부의 공(空) 사상과 유식(唯識)을 거쳐 화엄, 법화경에 이르면 기독교의 하느님, 유교의 천명(天命)이나 성(性)에 해당하는, ‘리(理)’라는 개념으로 넓어지고, 수많은 부처님이 등장합니다. 화엄에서는 우주의 원리 혹은 전체를 뜻하는 ‘리(理)’와 여기서 파생하는 개체들인 ‘사(事)’를 이야기하면서 ‘리’는 바다요, ‘사’는 바다 위에 솟구쳐 잠시동안 일렁이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물결에 비유합니다. 바다와 물결이 하나요 물결과 물결이 하나이니, 만물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오고 또 그리로 돌아가며 모두가 한 형제라는 기독교의 생각과 똑같지요.

나는 이제 하느님은 그저 나를 돌보아 주시는 절대자를 넘어서서, 나도 돌보아 주시고 나와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른 이들도 돌보아 주시고, 선인에게도 악인에게도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공중 나는 새들도 돌보시고 들에 핀 한 송이 나리꽃도 영화롭게 하시는 ‘사랑’ 그 자체이시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15세기 이슬람교 신비주의 수피즘의 스승인 하피즈는 하느님의 피조물이요 바다 위에 잠시 이는 물결인 ‘사(事)’ 자신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신의 숨결이 지나가는 피리의 한 구멍이니, 그대여, 이 음악을 들으라.“

글 김형태 변호사·<공동선> 발행인.

*이 시리즈는 김형태 변호사가 발행하는 격월간 <공동선>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