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사범은 김 사범을 “이기는 재주가 뛰어나다”고 치켜 세웠다. 박 사범과 김 사범이 각자 죽도를 들고 서 있다.
박 사범은 김 사범을 “이기는 재주가 뛰어나다”고 치켜 세웠다. 박 사범과 김 사범이 각자 죽도를 들고 서 있다.

▶ 박용천과 김정국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무명 검사’였다. 좋은 스승을 만나 동문수학하면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두 사람 모두 10대에 죽도를 잡아 벌써 30년이 지났다. 대학과 실업팀, 그리고 국가대표 선후배로 세계검도대회 단체전 준우승도 함께 일궈냈지만 때로는 이겨야 하는 상대로 마주친 세월이다. 두 사람의 칼은 이제 상대방이 아닌, 지고도 이기는 ‘예’의 경지를 향하고 있다.

김정국(47·7단) 사범이 겨눈 칼 앞에 당대 최고 검사 박용천(50·8단) 사범이 버티고 섰다.

두 사람은 전주대 1년 선후배 사이로 같은 스승 밑에서 혹독한 수련을 했다. ‘무림’으로 따지면 같은 문파의 사형사제지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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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두 사람이 1989년 9월 90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전북과 경남 대표로 맞붙었다. 개인 자격이 아닌 지역 대표로 나선 대회라 더욱 긴장됐다. 박용천과 김정국은 1988년 서울 세계검도대회에서 단체전 준우승을 이끌어 낸 주역들이라 검도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두 사람은 이겨야 하는 상대로 만난 첫 공식 대결에서 1점씩 주고받아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박용천과 김정국은 전국체육대회, 에스비에스(SBS) 검도왕대회, 고단자대회 등에서 딱 세 번 만났다. 김정국이 두 번을 이겼고, 한 번은 서로 비겼다. 박 사범은 두 사람의 대결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했고, 김 사범은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다. 박 사범은 “같은 소속이라서 많이 대결하지 않았지만 내가 이긴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이긴 자의 기억은 흐릿했고, 진 자의 기억은 또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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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뒤 1994년 3월 제2회 에스비에스 검도왕대회 결승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당시 쟁쟁한 검사들을 모두 꺾고 결승에서 만나 서로 감회가 남달랐다. 두 사람 모두 다음달에 있을 9회 프랑스 세계검도대회를 앞두고 국가대표로 뽑혀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 대학과 국가대표 생활을 함께 해 하루에도 겨루기를 수십 번씩 한 사이라 누구보다도 상대방을 잘 알고 있었다.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상대가 제일 무서운 법. ‘부동심’과 ‘존심’을 유지해야 하는데, 존심은 방심하지 않는 자세와 마음가짐이다. 박빙의 승부에서 자칫 방심하면 한판으로 진다. 경기 시간 5분이 5시간처럼 느껴질 정도로 긴장감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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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죽이고, 기술을 죽이고, 기를 죽여라

박용천은 아주 반듯한 검도를 한다. 바르고 정직한 칼인 동시에 기술이 넘치는 칼이다. 박용천과 맞선 김정국은 숨이 막혀왔다. “박 선배는 맞서보면 풍채가 큰 산이 하나 버티고 있는 느낌입니다. 아무도 그런 ‘냄새’를 풍기는 선수가 없죠.” 김정국은 어떤 선수와 맞서도 어렵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지만 박용천의 칼은 강하게 느껴졌다.

검도에서 효과적으로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삼살법’이다. 상대의 칼을 죽이고, 기술을 죽이고, 기를 죽이는 것인데 상대의 기운을 압도하는 걸 최고로 친다.

칼을 죽인다는 것은 상대의 칼을 누르거나 제치거나 감아서 상대방 죽도의 자유 동작, 즉 상대의 검선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기술을 죽인다는 것은 선을 잡고 숨쉴 틈 없이 공격을 계속해 상대가 기술을 걸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고, 기를 죽인다는 것은 끊임없이 전신에 기를 넘치게 하여 당당한 기백으로 상대의 기를 압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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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중단 겨눔 자세를 취한 두 사람은 호구 너머로 보이는 상대를 응시했다. 김정국과 달리 선배 박용천은 담담하게 서 있었다. 머리치기가 특기인 두 사람은 서로 상대의 머리치기를 경계했다. 특히 박용천의 제껴올려 머리치기는 당대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제껴올려 머리치기는 겨눔 자세에서 상대방과 칼끝이 스칠 정도의 거리가 되면 재빨리 상대 죽도를 아랫부분에서 위로 쳐내며 먼저 상대방의 머리를 공격하는 기술이다.

김정국 사범은 박용천 사범의 머리치기를 높이 평가했다. “머리치기는 아무래도 선배가 칼이 바르고 강해서 더 잘합니다. 나는 기교로 치는 것 같고 선배는 상대를 눌러놓고 기로써 치는 것입니다. 에프엠(FM)과 에이엠(AM)의 차이죠. 검도 본래의 머리치기와 시합에서 이기기 위한 머리치기의 차이라고 보면 됩니다.”

같은 스승 밑에서 수련한 전주대 1년 선후배 사이로 1989년 이래 딱 세 번 만났다 첫 공식 대결은 1-1 무승부 나머지 두 번은 김정국의 승중학교 때부터 검도 한 박용천은 1983년 전국체육대회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고 대학 1학년 때 국가대표 되며 검사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박용천의 기세가 정방형의 경기장(가로세로 9~11m) 밖으로 김정국을 압박해 밀어내는 듯했다. 하지만 김정국은 박용천의 기세에 눌릴 수 없었다. 그에게는 뛰어난 눈과 빠르기가 있었다. 검도는 상대방의 눈과 칼끝을 보고 느끼며 서로의 마음을 읽는다. 마음을 읽어야 상대의 움직임이 보이고, 한발 앞서 움직일 수 있다. 김정국은 상대를 읽는 눈이 박용천보다 낫다. 어떤 순간에 들어가서 상대를 쳐야 하는지를 잘 읽는다. 박용천은 “정국이는 칼을 보고 마음을 읽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했다.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어 정확히 격자(때리고 찌름)해야 승산이 있었다. 김정국이 빠르게 움직였다. 전광석화. 김정국의 칼이 박용천의 머리를 먼저 내려쳤다. 김정국은 머리치기와 손목치기로 박용천을 2-0으로 이겼다.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하늘 같은 선배를 꺾는 순간 김정국의 머릿속으로 지난날들이 영화 필름처럼 빠르게 돌아갔다.

대학시절 김정국, 도망간 뒤 돌아와 파죽지세

“김정국, 호구 써라.” 선배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머리치기, 허리치기, 손목치기, 연속된 공격으로 숨쉴 틈도 없었다. 호흡이 가팔라졌다. 한발 앞으로 들어가다 목찌르기를 당해 중심을 잃고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선배들은 돌아가면서 ‘경주 촌놈’ 김정국에게 본때를 보였다. 수없이 맞고 넘어지고 체육관 바닥을 뒹굴었다. 호구를 쓴 전주대 1학년 김정국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됐다. 손에 쥔 죽도도 울음을 참을 수 없는 듯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마구 떨렸다.

당대 최고의 검사들이 다니던 전주대 검도부에 들어온 지 넉 달 남짓 지났을 때 고민은 깊어갔다. 호되게 당한 날부터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도망갈까?

김정국은 그해, 1985년 6월 어느 날 검도를 접기로 마음먹었다. 다음날 가방을 싸서 경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경주로 가는 동안 후련한 마음도 들었지만, 알 수 없는 허전함은 떨칠 수가 없었다. 김정국은 집에 도착해 아버지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아버지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가 전주에 가서 감독님께 ‘정국이 검도 그만 시키겠다’고 전하마.”

김정국 사범은 아버지가 오히려 감독님에게 설득당해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석 달 후에 전국체육대회가 열리는데 그때까지만 검도를 할 수 있도록 해 달라. 정국이 빠지면 1명이 부족해 단체전에 나갈 수 없다”는 말 때문이었다. 김정국은 동료와 선배, 그리고 감독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 결국 다시 죽도를 잡았다.

드디어 전국대회가 열렸다.

파죽지세! 그가 휘두른 죽도에 상대 선수들이 하나씩 나가떨어졌다. 그해 10월에 열린 전국체육대회에서 대학부 단체전 3위에 올랐다. 두 달 뒤에 열린 회장기 전국단별검도대회 2단부 개인전에서 다섯 판을 잇달아 이기며 결승에 진출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16강에 오른 게 전부였다. 그런데 죽도를 내려치니 모두들 나가떨어졌다. 스스로 놀랬다. 비록 준우승이었지만 승리의 짜릿함을 느꼈다. 검도를 그만두려고 세 번이나 도망쳤다 돌아온 김정국의 인생을 바꿔놓은 순간이었다.

박용천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검도의 매력에 이끌렸다. 우연히 전북도청 옆에 있던 상무관에서 검도를 수련하는 모습을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지켜봤다. 3년 후 검도부가 있는 전주 서중에 입학해 곧바로 검도부에 들어갔다. 검도부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기가 찾아왔다. 해성고 3학년으로 착실하게 수련을 하던 3월, 검도부가 해체됐다. 봄날에 날벼락이었다. 검도를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스승인 전용술(70·8단) 사범의 설득으로 검도부를 갓 창단한 전주상고로 전학을 갔다. 3학년이었지만 학년을 낮춰 2학년으로 편입했다.

시련은 또 찾아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야 하는데, 그해 전주대 검도부가 해체돼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김정국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3년 동안 제대로 된 성적이 없던 박용천은 전 사범 밑에서 검도를 배우며 재수의 길을 택했다.

박용천과 김정국의 스승인 전용술 전북 익산중·고 검도 지도사범은 1961년부터 무도 경찰로 전북 상무관에서 경찰들에게 검도를 가르쳤다. 전 사범은 70년 1회 세계검도대회부터 4차례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했고 6회와 7회 대회 국가대표 코치, 8회와 9회 대회 국가대표 감독을 맡기도 했다. 1980년대만 해도 전북에서 일반인들이 검도를 배울 수 있는 도장이 없어 전 사범은 상무관에서 이들에게 무료로 검도를 가르쳤다. 박용천도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상무관을 오가며 전 사범을 스승으로 모시고 검도를 배웠다. 전 사범은 84년부터 89년까지 전주대 감독을 겸하면서 박용천과 김정국을 함께 가르치기 시작했다.

전 사범은 “용천이에게 하루에 도시락을 두 개씩 싸오라고 했다. 오전 연습을 하고 도시락 하나 먹고 오후 연습을 하고 도시락 하나 먹고…, 1년 동안 가르쳤다”고 했다.

김정국에게 박용천은 하늘같은 선배였다

박용천은 그해 가을, 1983년 10월 64회 전국체육대회에 전북 검도 대표로 나가 일반부 개인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최연소 일반부 우승이라는 타이틀도 함께 얻으며 검사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전국체육대회 우승자를 누가 마다하랴. 이듬해인 1984년 전주대 검도부가 부활하자 곧바로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4년 동안 다니고, 1년 재수를 한 박용천은 남들보다 2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전 사범은 “내 밑에서 용천이가 많이 울었다”고 회고했다. 박용천은 대학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돼 2학년 때인 1985년 6회 프랑스 세계검도대회 단체전 3위에 올랐다.

박용천이 국가대표로 활약할 때 김정국은 기초부터 다시 배웠다. 중학교 때부터 전 사범에게 기본기를 배운 박용천과 달리 김정국은 기본기가 엉망이었다. 김정국은 한마디로 ‘기검체 일치’가 안 됐다. 전 사범은 갓 들어온 김정국에게 “호구를 쓰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고 내려치기 연습만 시켰다. 박용천 사범은 “나한테도 정말 많이 혼났죠”라며 계면쩍게 웃었다.

전북 검도는 특히 예법에 강하고 수련 강도가 매우 높았다. 거기다 ‘텃세’까지 더해져 아주 죽을 맛이었다. 당시 다른 지역에서 유학 온 학생이 제대로 견뎌낸 사례가 없었다.

김정국에게 박용천은 하늘 같은 선배였다. 대학에 갓 들어온 김정국은 박용천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당시만 해도 박용천은 국가대표 선수로 당대 최고 검사였다. 3년 동안은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겨루기를 할 때면 일방적으로 난타당했습니다. 2학년 때는 조금 덜 맞았고, 저도 국가대표가 되면서 그래도 좀더 덜 맞았습니다.”

김정국은 선배인 박용천이 국가대표라고 쓰인 도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김정국은 1986년 2월 2단대회에서 우승한 뒤부터 목표가 생겼다. 국가대표가 되는 것과 박용천을 이기는 것이다. 김정국은 죽어라 연습만 했다. 남들이 1시간 하면 혼자 2시간을 더 했다. 다른 선수가 머리치기 1000번을 할 때 혼자 3000번을 했다. 김정국은 항상 “저 형님을 한번 이겨봐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독기를 품었다. 박용천은 김정국이 지독한 연습벌레라고 기억했다. “김정국은 스스로 부족한 게 많다고 생각해 다른 선수들보다 운동을 더 많이 했죠. 끈기와 근성이 있었습니다.”

김정국이 박용천과 맞서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불과 4년 만에 두 사람의 실력은 종이 한 장 차이처럼 얇아졌다. 김정국이 대학 4학년 때 국가대표로 함께 훈련할 기회가 많았는데 칼을 맞받아칠 수 있을 정도로 엇비슷해졌다.

대학을 졸업한 1989년 실업팀 올림푸스건설에 입단한 김정국은 당시 최고의 검사들이 총출동하는 대통령기 전국일반검도대회에서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김정국은 “그러니 당시에는 용천이 형이랑 머 비슷비슷해졌다고 봅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박용천은 ‘큰 칼’을 쓰고 김정국은 ‘기교파’다.

검도에서 말하는 ‘큰 칼’은 최고의 칼로 통한다. 전 사범은 “바른 칼과 자세는 용천이 뛰어나고, 경기 운영은 정국이 탁월하다”고 두 사람을 평가했다. “칼을 쓰는 맵시는 용천이 낫고, 점수 따는 데는 정국이 낫습니다. 용천이 칼은 무게가 있어 상대를 압도하는 강한 칼이고, 정국이는 경기에 이기기 위한 칼이라 기교가 뛰어납니다.”

김정국 팀이 이겼던 2011년 고단자검도대회

두 사람은 국내 검사 중에서 3년마다 열리는 세계검도대회에 국가대표로 가장 많이 출전했다.

박용천은 1985년 프랑스 세계검도대회를 시작으로 1997년 10회 일본 세계검도대회까지 5차례 연속으로 출전해 4차례 단체전 준우승을 일궈냈다. 박용천은 국내 대회에서도 13차례나 우승했는데, 김정국 사범보다 우승 횟수는 적지만 큰 대회에서 우승을 많이 했다.

김정국은 1988년 7회 서울 세계검도대회부터 8회 캐나다, 9회 프랑스, 11회 미국, 13회 대만 대회까지 모두 5차례 출전했다. 김정국은 특히 2006년 13회 대만 세계검도대회에서 단체전 주장으로 출전해 우승을 이끌어 한국 검도 역사를 새로 썼다. 준우승도 4차례나 했다. 김정국은 대학 졸업 이후 각종 대회에서 우승만 23차례 차지해 국내 검도인 중에서 가장 많은 우승 횟수를 자랑한다.

김정국에게 대만 대회는 “죽었다 살아난 대회”로 기억에 남는다. 일본을 이기고 올라온 미국 대표는 대부분 일본인 2세들이 선수로 출전해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마지막 주장 대결에서 지면 1-1이 되는 상황이었다. 김정국은 2000년 11회 미국 세계검도대회 결승전이 뇌리를 스쳤다. 덤벙대는 바람에 일본의 다카하시에게 허리와 손목치기를 당해 2-0으로 져 우승을 놓쳤다. 김정국은 실패를 교훈 삼아 조급한 마음을 누르고 눌렀다. 다행히 상대 선수가 더 긴장한 듯 서둘렀다. 김정국은 “여기서 실수해서 지면 선수 인생 끝”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허점을 노려 손목과 머리치기로 일본인 2세인 가와바타를 2-0으로 눌렀다.

국가대표 생활까지 끝낸 박용천과 김정국은 마흔 중후반 나이에 접어든 2011년 충남 아산에서 열린 고단자검도대회에서 다시 만났다. 고단자대회는 6단 이상 15명의 검사가 청팀과 백팀으로 나뉘어서 겨루는 단체전으로, 박용천이 청팀, 김정국이 백팀 소속이었다.

“머릿.” “머릿.” 박용천과 김정국의 우렁찬 기합 소리가 경기장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박용천은 먼저 들어갔구나, 한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효 격자를 인정하는 깃발이 올라오지 않았다. 심판이 득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쉬웠다.

죽도로 먼저 상대방을 가격했다고 해서 무조건 득점으로 인정되는 게 아니다. 검도 경기는 머리, 손목, 허리, 목 부분을 정확하게 가격해야 득점으로 인정된다.

기본기 엉망이었던 김정국은 검도 그만두려 3번 도망쳤지만 승리의 짜릿함을 느낀 뒤부터 독기를 품고 죽어라 연습하다 4년 만에 박용천을 따라잡았다 박용천은 반듯한 검도를 하고 눈치 빠른 김정국은 기교 뛰어나 “바른 칼과 자세는 용천이가 경기운영은 정국이 탁월하죠”

죽도로 상대방을 내리치는 것을 격자라고 하는데, 유효 격자는 한판을 인정할 수 있는 격자로 판별이 상당히 까다롭다. 검도 경기 규정에는 ‘충실한 기세와 적절한 자세로써, 죽도의 격자부로 격자 부위를 칼날을 바르게 하여 격자하고 존심이 있어야 한다. 이때 기검체가 일치해야 하며 단순한 맞추기식 검도가 되지 않기 위해 타격의 강도, 타격시 탄력과 반동이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유효 격자의 판단이 심판의 재량에 달린 만큼 득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심판의 검력과 공정성에 달려 있다.

“허리.” 이미 머리 공격으로 1점을 얻은 김정국의 칼이 박용천의 허리를 내려쳤다. 심판의 득점 기가 올라왔다. 김정국이 박용천을 또 이겼다.

“검도는 마음입니다. 이기려고 하면 집니다.”

두 사람은 승부를 기억하고 승부를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박 사범은 후배에게 지면 기분이 상할 법한데도 “상대가 나보다 뛰어난 것이고, 내게 허점이 있기 때문에 졌다. 나는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열심히 노력할 뿐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승부에 져서 기분 좋은 사람은 없지만, 승패에 연연하고 기분이 언짢은 그런 시기는 이미 지났다는 말이다. 박 사범은 “경기에 나가면 어차피 이겨야 한다. 정국이는 이기는 데 아주 뛰어나다”고 후배를 평가했다.

김 사범은 선배와의 승패가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를 내켜 하지 않았다. 후배가 선배를 평가하는 것은 선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선배를 이겼다고 말하기가 쑥스러웠던지 “두 사람이 박빙을 이뤘다”고 말하더니, “졌다고 얘기하긴 싫고 서로 무승부라고 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 검사는 모두 후진 양성을 위해 힘쓰고 있다. 박 사범은 전주 해성고 검도부 지도사범이고, 김 사범은 대구 김정국관 관장이다. 김 사범은 70명이 넘는 관원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는 기회가 되면 8단 승단에, 국가대표나 실업팀 감독을 하는 게 앞으로 바람이다.

박 사범은 2004년 선수 생활을 접고 2009년부터 해성고에서 4년째 지도사범을 맡고 있다. 박 사범은 지난해 국가대표 코치로 15회 이탈리아 세계검도대회에 나가서 단체전과 개인전 2위를 이끌어내 지도자로서도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박 사범은 8단으로 갓 승단한 올해 6월 8단대회에서 우승했다. 국내 8단은 55명 정도로 7단이 된 뒤 10년이 지나야 승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나이 제한도 있어 48살이 넘어야 한다. 검도 8단은 그야말로 기검체 일치뿐만 아니라 인격의 완성도까지, 검도에서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빠짐없이 갖춰야 한다.

박 사범은 검도의 ‘예’를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검도는 곧 마음입니다. 이겨야 하지만 이기려고 하면 집니다.” 김 사범은 지금까지는 차갑고 냉담했는데 이젠 따뜻해지려고 노력한다. “이기려고만 했는데 이젠 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 사범이 8단으로 승단하면 두 사람은 8단대회에서 다시 맞붙을 것이다. ‘기검체 일치’의 경지에 오른 두 사람에게 상대의 칼끝은 더욱 또렷하게 보일 것이다.

전주 대구/글·사진 이충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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