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소박해도 ‘돌아온 여왕’은 더 빛났다.

200석 규모의 동네 빙상장을 연상케 하는 독일 도르트문트 아이스슈포르트첸트룸 경기장. 객석수가 2010 밴쿠버올림픽 경기장의 100분의 1인 이 공간엔 수만명의 뜨거운 환호도, 보란 듯이 이겨줄 쟁쟁한 경쟁자도 없었다. 행여 자존심에 금이 가진 않을까, 걱정도 잠시. 그가 등장하자 무대는 상서로운 기운에 휩싸였다. 8일 영화 ‘뱀파이어의 키스’에 이어 9일 뮤지컬 ‘레 미제라블’ 삽입곡에 맞춰 특유의 애절한 연기가 시작되자 관객은 숨을 죽였다. 떨리는 듯 손 기도를 하던 여왕의 표정엔 긴장 뒤에 찾아온 안도의 기쁨이 가득했다.

20개월 만에 복귀한 김연아가 9일(현지시각)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끝난 NRW(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트로피 대회에서 합계 201.61점의 성적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8일 시니어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72.27점(기술점수 37.42점, 예술점수 34.85점)을 받은데 이어, 9일 프리스케이팅에서 129.34점을 받아 종합 201.61점으로 올시즌 여자피켜 싱글 최고 점수를 기록하며 피겨여왕의 화려한 귀환을 신고했다. 개인통산 4번째 200점대 기록이다. 쇼트점수 72.27점은 김연아가 2006년 시니어 무대에 데뷔한 뒤 국제대회에서 받은 점수 중 5번째로 높다. B급 대회지만 여왕의 건재함을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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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상아 해설위원은 “견줄 선수가 없었다.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평가했다. 김연아는 9일 트리플 살코와 더블 로투프 연결 점프 도중 20개월만의 복귀에 체력이 달린 탓인지 다리가 풀려 엉덩방아를 찧어 감점 1점을 받긴 했지만 이번 대회에서 ‘교과서 점프’를 무리 없이 소화하며 자신감을 얻었다. 트리플 러츠와 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기본점 10.10점)는 정확했다. 2010 밴쿠버올림픽과 2011 세계선수권에서 선보인 플라잉 싯스핀 대신 플라잉 캐멀스핀을 넣은 전략도 성공했다. 김연아는 “잠시 ‘삐끗한’ 순간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만족스럽다. 총점보다는 최소 기술점수를 넘기는 것이 목표였는데 성공해서 기쁘다”고 말했다.

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여성의 복잡한 내면(‘뱀파이어의 키스’)을 애절하게 드러내고, 소녀 코제트를 연기한 특유의 표현력(‘레 미제라블’)으로 예술점수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뱀파이어의 키스’는 음악이 다소 심심하다는 평가도 나왔지만, 연기력만큼은 전성기 그대로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김연아가 완벽한 연기를 펼쳤다”고 했고, <이그재미너>는 “가장 어려운 점프 조합인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점프에 성공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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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복귀로 라이벌 아사다 마오(일본)와의 대결이 관심으로 떠올랐다. 아사다는 8일(한국시각)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2012~2013 국제빙상경기연맹 그랑프리파이널에서 196.80점(쇼트 66.96점, 프리 129.84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당장 내년 3월 캐나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만난다. 김연아는 내년 1월 국내 대회인 전국남녀피겨종합선수권에 출전한 뒤, 3월 세계선수권대회에 나선다. 이 대회에서 24위 안에 들면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에 나갈 자격을 얻는다.

김연아는 대회를 앞두고 “전성기 시절과 비교해 몸상태는 80~90% 수준”이라고 했다. 체력을 끌어올리고, 새로 시도한 부분을 다듬는다면 다시 한번 ‘여왕의 시대’를 몰고 올지도 모른다. 한 피겨 국제심판은 “점프와 스피드가 좋았다. 스핀에서 흔들린 것만 보완한다면 소치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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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