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수(43) 미국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감독이 선수 학대 논란에 휩싸였다. 미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들과 감독의 공방이 시작됐고 곧 결과가 나올 것이다. 전 감독으로서도 해명의 기회를 아예 박탈당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미국 선수들의 목소리다. 국내외의 수많은 사건들은 대체로 ‘피해자’의 목소리가 사실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직접 겪은 다음과 같은 일도 그렇다. 몇 해 전, 국가인권위원회는 학생선수들의 인권 향상을 위하여 전국 순회 특강을 했는데 필자도 몇 차례 참석했다. 내 순서가 있기 전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먼저 특강을 했다. 그야말로 ‘한국을 빛낸’ 같은 수사가 어울리는 올림픽 ‘영웅’이었다.
그는 유소년 시절에 많이 맞았고 직업 선수가 된 후에도 매서운 기합이나 가혹한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이제 그러한 지도 방식은 한계에 왔다’는 쪽으로 이야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영웅’은 그런 과정을 이겨냈기 때문에 금메달을 땄다고 했다. 코치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때리지도 않았고 훈련도 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참담했다. 지도자의 사랑과 기대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 실천 방식이 매서운 기합이나 가혹한 훈련이란 말인가. 우리 모두가 겪어서 알고 있지만 폭력을 가하는 사람은 사태가 발생하면 언제나 감정적인 호소를 한다. 사랑하는 제자의 미래를 위한 행동이라고 말이다. 그 심정은 받아들인다 해도 그 방법은 더 이상 수긍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세상에는 그런 방식을 전혀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성과를 내는 출중한 지도자들이 숱하게 많다. 게다가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수많은 스포츠 선진국의 지도자 프로그램은 가혹한 훈련이 아닌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제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기성용 선수다. 일찌감치 호주로 축구 유학을 갔던 기성용 선수는 한국의 가혹한 훈련 방식이나 은밀한 폭력과는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와 합리적인 시스템이 잘 짜인 현지의 프로그램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많은 종목에 걸쳐 유능한 한국 지도자들이 세계 곳곳으로 많이 진출해 있다. 그들이 현지에서 겪은 일차적인 어려움은 이른바 ‘문화적 차이’다. 한국에서 선수나 지도자 생활을 할 때 했던 행동을 자연스럽게 했다가는 금세 논란이 되곤 한다. 부분적으로는 그런 측면이 있을 것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오해’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차이’라는 말로 항변하기보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받아들이는 자세다. 가혹한 체벌이나 필요 이상의 훈련은 ‘차이’가 아니라 ‘폭력’이나 ‘학대’일 수 있다. 전재수 감독의 경우는 논란이 이제 막 시작된 사안이므로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혹시라도 자신의 행위가 ‘차이’라는 말로 해명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구상의 어떤 나라에서도 해서는 안 될 언어적 물리적 폭력이었는지도 깊이 헤아려 보기를 바란다.
정윤수 스포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