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프란세스코
이탈리아의 프란세스코

[stage4] 41km = 아침에 코스 지도를 받아보니 cp2~cp3(14km) 'Extremely Difficult' 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지금까지도 어려웠는데 지금보다도 더 ‘극단적으로’ 어렵다니…. 하지만 마음을 다스리며 오늘의 레이스를 준비했다. cp1까지는 돌사막의 오르막이라 어렵게 시작 됐다. cp1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100m가 넘는 언덕을 내려가는 코스가 나타났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모래가 많아 다행이었지만, 균형을 잃어 ‘넘어져 구르기라도 하면’이라는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언덕 밑에는 내 키보다도 큰 갈대밭이라서 마치 미로 속을 해매는 기분이었다. cp1에 도착 한 후 신발을 벗고 모래를 털어내는 몇 분 사이 같이 달렸던 친구들이 금방 눈에서 사라져 버렸다. 작은 마을을 지나 그전에는 보지 못한 너무나 넓은 평원이 나타났다. 지면은 자갈들이 있었지만 비교적 평평했고 cp2까지는(14km) 거의 내리막이었다. 하지만 무릎이 약한 나에게는 오히려 더 부담이 되는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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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와 프란세스코가 짝을 이뤄 앞에서 달렸고, 미국인 조와 내가 짝을 이뤄 20~30m 뒤에서 달렸다. 거리는 벌어졌다 좁혀졌다를 반복했지만, 조와 내가 따라가기에는 어렵게 빨리 달리고 있었다.

힘들어 할 때마다 옆에서 윙크를 하고 엄지손가락을 높이 들어 올리며 힘내라고 격려해주는 조가 고마웠다. 하지만 어제 달리면서 발목을 접질렀던 부분이 많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평원을 지나 우리 4명은 cp3에 같이 도착했다. 하지만 다시 앞에 펼쳐진 소금사막은 보는 것만으로도 질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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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cp3 까지는 코스가 어렵다 보니 다리가 긴 마크와 프란세스코가 앞에서 걸었고 다리가 짧은 조와 내가 뒤를 따라 걸었다. 간격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더구나 신발을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마른 가시 풀 같은 것이 신발 속으로 들어와 따끔 거렸다. 또 날카롭게 굳어버린 소금 흙(돌)들이 발등을 찔러 걷는 것도 너무 힘들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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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마라톤을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다시는 참가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다. 코스가 험해 14km의 거리를 한 번도 뛰지 못하고 걷다보니 2시간 30분이 되어서야 통과했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힘든 코스였다.

cp3을 지나 캠프까지는 6km였고, 길을 따라 가는 코스라 쉬웠지만 발목이 많이 아팠다. 마크 등이 먼저 캠프에 도착했고 몇 분지나 조와 내가 캠프에 도착했다. 배가 고팠지만 음식을 먹을 정신도 없이 텐트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내일 롱데이가 많이 걱정 되었다. 발목이 많이 부어있었다. 오늘 따라 바람은 왜 이렇게도 세차게 불어대는지 누워있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얼마 후 텐트밖에 나와 보니 이용술, 김경수 선생님이 차를 타고 캠프에 도착해 있었다. 이용술님이 포기하는 바람에 같이 눈이 돼 주시던 김경수님도 혼자 뛰지 못하고 같이 와 있었다.

사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신 이용술님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존경스러웠고 힘들어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김경수님께도 너무 부끄러웠다. 사막에서 자기페이스대로 달리지 못하고 남의 눈이 되어 달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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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스스로 힘들다는 소리 안하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해 나가는 걸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경수님은 정말 천사 같은 분이셨다.

[stage5] 81km Long day = 선두 그룹 20명을 제외하고는 오전 8시에 출발했다. 오늘 레이스가 많이 걱정되었다. 발목은 어제보다 많이 부어있었다. 테이핑으로 발목을 감으며 출발시간을 기다렸다. 우린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출발했다. 오늘까지의 기록을 보면 1위를 달리고 있는 마크와 2위인 조의 시간 차이는 35분. 그리고 조와 3위인 프란시스코는 3분의 시간 차이가 있었고, 15분이 늦은 내가 4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의 조.
미국의 조.

사막 마라톤에서는 30분 이내의 시간차이라면 컨디션과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시간이다. 솔직히 이날 아침까지도 3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발목이 안 좋은 상태라 오늘 레이스가 무난히 끝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지금까지 사막마라톤에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될 만큼 오늘 롱데이는 많은 부담이 되는 거리였다. 어제와 같이 우리 4명은 무리를 지어 같이 달렸다. 3위를 하고 있는 프란시스코는 몸 상태가 좋아보였지만 순위에 대한 욕심이 없어보였다.

출발은 소금사막을 지나면서 시작되었다. 소금밭 사이에 가끔씩 갈대밭이 나타났다. cp2를 지나면서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씩 만나는 한국 사람들과 인사를 건네며 뛰고 있었지만 발이 많이 아파왔다.

가장 힘들었던 소금 사막을 건너다.
가장 힘들었던 소금 사막을 건너다.
롱데이 날 선두 그룹 20명을 제외하고 먼저 출발 하는 선수들.
롱데이 날 선두 그룹 20명을 제외하고 먼저 출발 하는 선수들.

다행히 우리 선두 그룹 5명은 어느 한 사람 먼저 가려고 하지 않고 모두가 같이 가자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cp3이 가까워오면서 너무나 크고 웅장한 모래 언덕이 나타났다. 힘겹게 모래언덕을 올라가는 와중에도 멋진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에 난 카메라를 꺼내 셔텨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모래언덕을 오르고 나니 멀리에는 아름다운 사막풍경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언덕 위에는 처음 보는 신비한 풍경이 나타났다. ‘달의 계곡’이라는 곳인데 지구상에서 달의 표면하고 가장 비슷한 곳이라고 했다. 미국의 우주 비행사들이 여기에 와서 훈련을 한다고 들었다. 불규칙적인 바위들과 하얗게 뿌려진 소금이 굳어있는 형상은 낯설면서도 신비로움으로 다가왔다.

‘달의 계곡’을 지나 cp3이 나타났고 이후로는 계속되는 평지라 코스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발목이 너무 많이 아파 힘든 레이스는 계속됐다. 아일랜드의 빌리와 내가 선두와 조금씩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고 끝이 보이질 않을 것 같은 레이스는 계속됐다. 그러는 사이 그렇게 아프던 발목의 통증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는 어느새 레이스에 속도가 붙었고 마지막 cp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마지막 cp를 지나서는 소금계곡이 나타났다. 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날씨가 추워져 우리 모두는 배낭에서 자켓을 꺼내 입었다. 코스도 험난하고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아 걷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 희미하게 형상만 보이는 소금계곡의 풍경이었지만 그래도 멋있었다. 바닥에는 마치 눈이 온 것처럼 하얗게 소금이 쌓여있었고 소금계곡의 동굴 속으로도 여러 번 지나갔다.

한 시간을 넘게 걸어 저녁 7시가 조금 넘어 캠프에 도착했다. 모두들 너무 배고프고 많이 힘이 들었는지 서로 포옹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서로 많은 얘기들은 안했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너무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힘든 레이스를 같이하면서 우린 서로 너무 가까워졌다는 것을 눈빛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다들 생각했을 것이다. 순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는 거라고.

그러면서 우린 이렇게 더 가까운 친구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때론 경쟁하면서 순위에 집착할 때도 있지만 힘들 때는 이렇게 서로 도울 수 있는 것은 다른 대회와는 다른 사막 마라톤만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

모래 언덕을 오르다.
모래 언덕을 오르다.
달의계곡을 지나다.
달의계곡을 지나다.

너무 피곤해서 금방 잠이 올 것 같아 텐트에 들어와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발목도 너무 많이 아팠고 날씨도 너무 추워 모든 게 고통으로만 느껴졌지만, 이제 큰 고비는 넘겼다는 생각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오늘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해준 레이스였다. 힘든 레이스도 누군가와 같이 한다면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고, 순위와 경쟁에만 집착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본다면 그동안 그냥 지나치기만 하면서 보지 못한 또 다른 멋진 세상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한 레이스였다.

그동안 난 너무 앞만 보며 달려왔다. 지난 고비사막 때 너무 앞만 보며 미친 듯이 내달렸던 내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워지는 날이다. 우리의 세상살이도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산다면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을 텐데…

7월28일 휴식 = 거칠고 길었던 하루가 지난 뒤에 꿀 맛같은 휴식의 날이다.

하루종일 캠프 주변을 산책하며 지진 몸과 마음을 추스렸다. 고통은 순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달리는 동안 느꼈던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그리고 새로운 의욕이 생기곤 한다. 그러기에 달릴 수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아래 현지인들이 피워놓은 모닥불이 따뜻하다. 그리고 포도주 한 잔을 마시며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다보면 어느덧 밤이 깊어 간다. 별이 되어버린 체 게바라의 영혼이 자꾸만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롱데이가 끝나고 피니쉬 라인에서.
롱데이가 끝나고 피니쉬 라인에서.

[stage6] 12km = 오늘도 선두그룹 20명이 나중에 출발했다.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사진을 찍으며 휴식을 취했고 너무나 힘들었던 지난 일주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부을 대로 부어버린 발목은 마지막 까지도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지 못했다.

선두그룹이 그렇게 빨리 뛰지는 않았지만 절룩거리는 발목으로 따라가기에는 무리였다. 그렇게 한참을 따라가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속도를 줄이고 뒤로 물러섰다. 순간 이번 대회 내내 선두그룹에서 같이 뛰었던 미국인 조가 내가 발목 때문에 내가 너무 아파한다며 다른 친구들에게 속도를 줄이자고 했다.

내게는 그 말이 얼마나 고맙게 들렸는지 모른다. 사실 이번 대회 내내 선두그룹에서 같이 뛰었던 친구들과 같이 결승점을 통과하는 것 만으로도 내게는 영광이었다. 또 그렇게 나를 배려해 주는 친구들이 너무나 고마워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때는 ‘땡큐‘라는 단어 하나밖에 외치지 못했지만 지금 다시 한 번 너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Mark, Jo, Franchsco, I heartily appreciate” (‘진심으로 고마워!’라는 영어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아픈 발목을 참고 힘겹게 뛰는 동안 어느새 마을에 도착했고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피니쉬라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원 봉사자로 일했던 현지인들이 라틴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자원 봉사자로 일했던 현지인들이 라틴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드디어 멀리 많은 사람들과 피니쉬라인이 보였고, 결승점 50여m을 남겨놓고 이탈리아의 프란세스코가 ‘SAVE THE CLIMATE : ENERGY REVOLUTION -GREENPEACE-’ 라고 적힌 깃발을 꺼내 들었고 우리 4명은 길게 펴서 같이 들고 피니쉬라인을 통과했다.

선두그룹이라 많은 카메라 불빛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정신이 없었지만 너무 힘들었던 이번 대회도 이제 모두 끝이라는 생각에 우린 서로를 껴안으며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같이 참가했던 한국선수들이 축하한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서로 기념사진을 찍으며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동안 참가했던 사막마라톤 중 가장 힘들었던 250km의 레이스와 너무나 멋진 친구들과의 만남은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바라본 밤하늘의 아름다움만큼이나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아타카마 사막에서 함께했던 친구들.
아타카마 사막에서 함께했던 친구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