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디황 작가가 경기 화성시 자신의 작업실에서 공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9일 디황 작가가 경기 화성시 자신의 작업실에서 공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9일 오후 경기 화성시. 경부고속도로 기흥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밭과 창고 사이로 나 있는 구불구불한 길을 20여분 따라가자, 창고용 조립식 2층 건물이 나타났다. 맞게 왔나 싶어 사전에 문자메시지로 받은 주소를 확인하는데 ‘덜컹’ 소리와 함께 창고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긴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을 한 남자가 나타났다. 금속을 소재로 한 인더스트리얼 분위기의 ‘마초적’ 작품을 만들어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디황(47) 작가다.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그가 좋아해 한때 사업까지 했었던 바이크를 소재로 한 작품이 진열돼 있었고, 한쪽엔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바닥에 고정시켜놓은 자전거가 보였다. 금속 작품을 많이 만드는 탓에, 철공소 같은 느낌도 들었다. “터프한 느낌이죠. 정리가 잘 안 돼 있는. 하하.” 그가 굵은 소리로 웃었다. 정리가 안 돼 있다고 했지만 의도된 듯 보였다. 그의 작품처럼 곳곳에서 ‘수컷’의 느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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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적 느낌이 강한 디황 작가의 작업실. 디황 작가 제공
남성적 느낌이 강한 디황 작가의 작업실. 디황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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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올라가시죠.” 올라가자, 1층과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전시실, 의상실, 침실이 뒤섞여 있는 공간이었다. 최근 뜨는 서울 성수동이나 문래동 쪽의 갤러리에 와 있는 느낌이랄까. 어두침침하면서 정리가 안 된 듯하지만, 단정해 보이는 묘한 분위기였다. 기묘한 형태의 스탠드는 직접 제작한 것이고, 소파는 중고시장에서 30만원에 구입한 것이다. 가벽으로 구분한 방안 벽 선반 위엔 피규어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가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은 2011년. 서울에서 살다 부모님이 살고 있는 이곳으로 왔고, 동생과 함께 사람 한명 쓰지 않고 두달에 거쳐 공간을 만들었다. 작업실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지만, 때에 따라 운동도 하고 휴식도 취한다. 2층에 있는 방은 휴식 공간으로 쓰려고 3년 전에 만들었다. 그렇게 자신만의 ‘동굴’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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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이 물씬 배어나오는 디황의 작업 공간은 ‘맨 케이브’(Man Cave) 전형으로 자주 언급된다. ‘남자의 동굴’로 해석되는 맨 케이브는 몇 년 전부터 떠오르고 있는 인테리어 트렌드다. 동굴처럼 독립성이 보장되면서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주로 집의 지하실, 창고, 작업실 등이 대상이 된다. 과거엔 ‘골방’으로 불렸던 곳들이다.

맨 케이브 인테리어는, 인테리어가 주부나 여성의 것이란 편견을 벗어난다. 가정에서 잘 쓰지 않는 회색, 검정 등 어두운 단색을 과감히 쓰고, 피규어, 게임, 오디오, 홈시어터 등 남성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이름 그대로 ‘남성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혼자 사는 20대 남성과 경제력 있는 30~40대 남성이 주요 소비층으로 분류된다. 트렌드정보회사 ‘스타일러스’의 안원경 실장은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기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남성들이 늘어나면서 자신만의 공간인 집을 각자의 취향과 개성에 맞게 꾸미고자 하는 욕구도 점차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옛 공간 사옥에 있는 김수근의 서재. 아라리오뮤지엄 제공
서울 종로구 원서동 옛 공간 사옥에 있는 김수근의 서재. 아라리오뮤지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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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맨 케이브는 과거에도 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서재가 대표적이다. 당시 맨 케이브를 완성하는 소품들은 책상과 병풍, 그림, 도자기류였다. 근대에 와선,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공간 사옥’(현재 아라리오뮤지엄)을 들 수 있다. 1977년 완공된 이 건물 3층의 옛 김수근 집무실엔 꼭 화덕피자집의 화덕을 연상시키는 동굴이 있다. 지금은 미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이지만, 원래 용도는 김수근의 서재였다. 어머니의 자궁을 모태로 해 만든 이 ‘동굴’에서 김수근은 책을 읽거나, 간이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등 본인만을 위한 폐쇄적 용도로 사용했다.

남성들은 맨 케이브에 왜 열광하는 것일까. 실마리는, 해결해야 할 문제에 부닥쳤을 때 남성의 경우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경향이 커진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기만의 공간은 필요하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은 사회적 차별, 가사노동과 육아 부담 등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공간이다. 반면 남성에겐 책임감, 체면, 위계질서 같은 ‘관계’를 잊고 자유롭고 싶을 때 절실해지는 게 ‘동굴’이다. 말하자면 맨 케이브의 본질은 외로움인 셈이다. 자신만의 공간에 자기를 가두면서 외로움을 극대화하고 ‘다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로움은 무언가 해야겠다는 열정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동굴 속에 박혀 책을 읽은 김수근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쾌히 즐겁게, 스스로 꾸준히 하라는 수식적인 의미를 전달해보려고 애를 써보았다. 그러나 나의 미진한 자질 때문에 생각했던 만큼의 결실을 갖지는 못하였다. 나는 때때로 외로웠고, 지금도 그런 때가 있다”며 문화예술잡지 <공간>을 발행하게 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김수근과 장세양의 <공간사옥>, 시공문화사) 김수근에게 외로움은 누군가를 즐겁게 만들어야겠다는 동기를 부여한 셈이다. 디황 작가 역시 이런 말을 했다. “여기에 있으면 되게 외로워요. 하지만 심심하진 않아요. 하루 종일 작업을 하게 되거든요. 외로움을 즐기지 않으면 맨 케이브를 만들 이유도 없죠.”

남성 취향의 가구들로 꾸민 ‘맨 케이브 인테리어’의 예. 까사알렉시스 제공
남성 취향의 가구들로 꾸민 ‘맨 케이브 인테리어’의 예. 까사알렉시스 제공

평범한 집에서 맨 케이브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서울 홈테이블데코페어’에서 선보일 맨 케이브 부스를 제작한 ‘유메이크홈’의 김의종 팀장은 이렇게 조언한다. “맨 케이브 인테리어는 오감 인테리어가 특징이다. 개인의 취미나 취향이 완벽하게 녹아 있어야 한다.” 야구광이라면 수집한 야구모자나 저지셔츠 등을 몇 개 벽에 걸어두고, 커피를 좋아한다면 원두 포대를 가림막 등으로 활용하면 생기 있는 ‘남자의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남성성이 느껴지는 의자나, 금속 느낌이 강한 전자제품들도 비슷한 효과를 줄 수 있다.

색상도 중요하다. 가정집 벽은 대부분 흰색인데, 검은색을 활용하면 남성미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변신시킬 수 있다. 한화엘앤씨의 이수진 디자이너는 “검은색 액자나 쿠션, 전구 스탠드를 적절하게 배치하면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공간 연출이 가능하다. 여기에 남성적인 머스크 향이 나는 향초를 켜 두면 남자만의 공간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개성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디황 작가는 “맨 케이브 인테리어 콘셉트를 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닌 자신이다. 남이 해놓은 것을 보고 그대로 자기의 공간에 가져오니 조잡해 보이고 실패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찬찬히 생각하고 콘셉트를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맘에 든다고 이것저것 사서 놓아둔다고 인테리어가 되는 게 아니란 얘기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어느 각도에서든 최적의 착좌감을 제공하는 최고급 남성용 의자 시디즈 ‘티(T)80'. 퍼시스 제공
어느 각도에서든 최적의 착좌감을 제공하는 최고급 남성용 의자 시디즈 ‘티(T)80'. 퍼시스 제공

알루미늄 특유의 광택과 원뿔형의 심플한 외관으로 남성적 느낌을 주는 ‘베오사운드2'. 뱅앤올룹슨 제공
알루미늄 특유의 광택과 원뿔형의 심플한 외관으로 남성적 느낌을 주는 ‘베오사운드2'. 뱅앤올룹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