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철도가 처음 개설된 건 117년 전이다. 1899년 9월18일 서울 노량진(가정거장)~인천 제물포 구간에서 기차가 첫 기적을 울렸다. 100년 넘는 세월 동안 방방곡곡으로 뻗어가며, 도심과 항구와 산골마을들을 거미줄처럼 연결해온 철도. 화물 싣고 서민들 애환 싣고 달리는 동안, 녹슬고 정들며 추억 쌓여온 기찻길들이다. 산업 발달과 도시화에 따라 일부 노선은 직선화·복선화·전철화를 거치며 사라져가기도 하는데, 특히 도심의 철길은 교통체증·소음을 유발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철거 대상이 돼왔다.
이런 폐선로 터는 과거엔 택지 등으로 개발되기 일쑤였다. 요즘 추세는 관광자원화다. ‘추억의 기찻길’ 자체가 인기 여행지로 떠오른 지 오래다. 전국 곳곳의 폐선로들이 ‘레일바이크’나 자전거길·철길공원 등으로 새단장돼 인기 여행코스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서울 도심에도 옛 철길 터들이 멋진 산책로 겸 휴식공원으로 거듭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최근 전철화·지중화로 폐선돼 철길공원으로 조성되고 있는 경의선·경춘선 도심 구간이 대표적이다.
공원화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경의선·경춘선 두 철길공원 산책로를 개장에 앞서 미리 걸어봤다. 공원으로 단장을 마친 일부 구간은 이미 시민들의 산책로 겸 쉼터로 자리잡은 모습이다. 아파트 숲 사이로, 주택가로 또 산모퉁이로 아스라이 뻗어나간 철길공원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꽃 피고 새 우는 서울 도심의 봄 정취를 누려볼 만하다.
번화가 관통하는 도심공원 경의선숲길
5월 개장을 앞두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경의선숲길’ 공원. 지난 3일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에서 시작해 가좌역까지 개통된 구간을 따라, 공사중인 곳은 우회하며 걸었다. 이날은 마침 경의선(용산역~신의주역) 개통(1906년 4월3일) 110돌이 되는 날. 옛 자취는 사라졌지만 100여년 세월이 깃든 폐선로 터를 따라 걷는 느낌이 남달랐다.
‘경의선숲길’은 경의선 중 용산선의 서울 도심구간이 전철화·지중화되며 폐선된 철길 터에 조성되는 공원이다. 2012년 1단계로 대흥동 구간(760m)이 선보였고, 지난해 6월 2단계로 연남동(1268m), 새창고개(630m), 염리동(150m) 구간이 개장했다. 5월 중 서강역~홍대입구역, 용산~원효로~효창역 구간 공사가 마무리돼 6.3㎞ 전 구간을 개통할 예정이다.
효창공원앞역 3번이나 4번 출구로 나와 용문사거리에서 우회전해 잠시 오르면 깔끔하게 공원으로 조성된 새창고개 구간과 만난다. 용산 쪽 원효로 구간(330m)과 새창고개로 오르는 들머리 구간은 공사중이다. 새창고개는 용산구 효창동에서 마포구 도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조선시대 대동미 등 출납을 관장하던 선혜청에 딸린 창고 만리창을 새로 지었던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아파트 숲 사이로 뻗어오른 철길 터에 새로 심은 소나무·복숭아나무·버드나무·단풍나무·조팝나무들은 가지마다 앞다퉈 힘껏 초록 새순을 내밀고 있다. 널찍한 잔디밭 사이로 시멘트 포장된 자전거도로와 산책로, 쇄석과 침목 등을 깐 장식보도, 물길 등이 만들어져 있다. 이런 풍경은 도착점인 가좌역 연서지하보도 앞에 이르기까지 비슷하게 이어진다.
새창고개 넘어 버드나무 한 그루가 초록 주렴을 내걸기 시작한 내리막에 이르면, 철길공원 윤곽이 사라지고 거대한 건물 신축공사장이 가로막는다. 공덕역사 복합시설 공사장이다. 건널목 건너 또다른 공사장 사잇길을 지나면 염리동·대흥동 구간으로 이어지는 공원길로 들어서게 된다. 컨테이너·천막이 늘어선 마당은, 폐선로 등 공유지의 대기업 막개발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이 펼치는 장터 ‘공유지 난장’(늘장)이 열리는 장소다. 오는 9일(토 오후 2~6시) 이곳에선 어린이들이 중고책을 사고팔거나 바꿔갈 수 있는 ‘아빠와 함께하는 봄나들이 늘장 어린이책 장터’가 열린다.
여기서부터 한동안은 대형 빌딩과 주택가 사이로 곧게 뻗은 널찍한 공원길이 이어진다. 목련·산수유·벚꽃 만발한 공원길엔 킥보드 타고 질주하는 어린이부터 애완견과 함께 나온 여성들, 그리고 지팡이 짚고 산책하는 어르신까지, 말 그대로 남녀노소가 고루 섞여 걷고 쉬고 달리고 노닌다. 공원길 따라 아담한 카페·식당들과 편의점도 이어진다. “공원이 된 뒤로 주말엔 장사가 좀 된다”는 한 편의점 주인의 말은 “엄청 잘된다”는 뜻으로 들렸다.
공원길은 마포세무서 앞(대흥역 부근) 길 건너 잠시 오르면 다시 공사장으로 바뀐다. 여기서부터 홍대입구역까지 공사중이므로, 골목길을 따라 30~40분쯤 걸어야 한다. 홍대입구역 3번 출구에서 가좌역 못미처 연서지하보도 앞에 이르는 약 1.3㎞ 거리는, 개통된 경의선숲길 공원 중 가장 널찍하고 잘 가꿔지고 붐비는 구간이다. 따스한 봄 햇살 받으며 산책하다 의자에 앉아 쉬는 어르신들, 잔디밭에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대학생들, 거리 구경 나온 외국인들, 그리고 애완견과 공을 주고받는 이들까지 평일·주말 따로 없이 인파로 북적인다. 공원 옆엔 개성적인 디자인을 뽐내는 카페들과 식당들이 즐비하다. 젊은이들 모여드는 ‘핫한’ 공간으로 떠오른 연남동 거리와 이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연남동의 센트럴파크(뉴욕)라는 뜻의 ‘연트럴파크’라고도 불린다.
공원길을 따라 길게 조성된 인공 물길(5월부터 가동)과 아파트와 공원길 사이에 길게 늘어선 은행나무 행렬이 인상적이다. 은행나무들은 철길 옆에 본디 있던 것이다. 공원 길 분위기가 아직 초록빛은 아니지만, 이미 져가는 매화꽃과 목련, 새로 피어나기 시작한 벚꽃·개나리·살구꽃들이 두루 화사하다. 기존 경의선 철길과 만나는 연서지하보도 옆 도로변에선 옛 ‘기찻길 옆 오막살이’를 떠올리게 하는 허름한 주택 늘어선 골목길도 만난다. 살구꽃·벚꽃·개나리 흐드러지게 피어난 벽화 마을이다. 경의선 철길 밑 시멘트담벽 틈에 뿌리를 내리고 꽃피운 개나리도 눈길을 끈다.
이 일대는 과거 홍제천의 지류 세교천 물길이 있던 곳이다. 난지도 제방 축조로 홍제천 물길이 바뀌면서 세교천은 복개됐는데, 이를 상징하는 인공물길을 철길공원에 조성해놓았다. 경의선숲길 공원은 현재 기존 경의선(서울선)과 만나는 언덕 고가차도 밑에서 끝난다. 서울시는 앞으로 경의선 철길을 통해 홍제천 건너 가좌역에 이르는 보행로를 추가로 개설할 계획이다.
폐선로가 택지 등으로 개발되지 않고 근사한 숲길공원으로 거듭난 것은 다행이지만, 직접 걸어보니 옛 철길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등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일부라도 옛 모습을 남길 수는 없었을까. 장식용으로 깔아놓은 레일 조각과 침목들, 건물들 사이로 곧게 뻗은 공간을 통해 옛 철로의 윤곽을 짐작해볼 따름이다. 공원 안내 표지판엔 잘못된 표기도 있었다. 남산의 옛 이름인 ‘목멱’을 ‘목면’으로 썼고, 못·연못을 ‘폰드’라고 표기했다. 보행자를 위한 화장실이 없는 것도 아쉬웠다. 주변 상가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철길 옛 모습 살려 조성한 경춘선숲길
1939년 개설된 경춘선(옛 성동역~춘천역)은 우리 민족자본으로 개설된 첫 철도다. 일제 강점기에 강원도청을 춘천에서 (철도가 놓인) 철원으로 옮기려 하자 춘천 유지들이 힘을 모아 경춘선 철도를 개설했다고 한다.
‘경춘선숲길’ 공원은 지난해 8월 개장한 1단계 구간(공덕제2철도건널목~화랑대삼거리 1.9㎞)에 이어 오는 9월 2단계 개장(경춘철교~산업대3길 고가철교)을 거쳐 내년 5월 6.3㎞ 구간을 완전 개장하게 된다. ‘경의선숲길’이 널찍하게 잘 다듬어진 공원길이라면, ‘경춘선숲길’은 폭이 좁고 단조로우나 철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옛 기찻길 정취를 누리며 걷기에 좋은 산책로다.
1단계 철길공원 출발점은 지하철 7호선 공릉역 부근의 공덕제2철도건널목이다. 주택가 사이로 이어지다, 차도를 만나 육군사관학교 앞까지 이어지는 공원길은 레일과 침목 등 본디 철길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거니는 맛이 각별하다. 산책로 겸 자전거도로를 새로 조성했고, 한창 꽃을 피운 산수유·벚나무·개나리들도 즐비하다. 차도와 나란히 달리는 구간에선 차량 소음이 귀에 거슬리기도 하지만, 곧게 뻗어나가고 또 휘어져 사라지는 철길 풍경이 이런 단점을 상쇄시켜준다.
조성된 공원길은 화랑대삼거리에서 끝나지만, 여기서 산책을 마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차도 건너 옛 화랑대역 앞쪽으로 다시 시작되는 철길을 거닐어볼 만하다. 깨진 신호등도, 옛 철로변경장치도, 녹슬어가는 옛 화랑대역 표지판도 고스란히 남아 ‘추억의 기찻길’ 정취를 안겨준다. 1959년까지 쓰인 옛 역이름 ‘태능’ 표지판도 남아 있다. 육사 생도들이 주로 이용하던 화랑대역은 건물 자체가 등록문화재다. 녹슨 채 남아 있는 옛 철길은 육사 후문 앞과 태릉골프장 입구를 지나 서울시 경계까지 이어진다. 화랑대삼거리에서 옛 화랑대역 거쳐 육사 후문까지만 걸어도,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합쳐지며 뻗어나가는 기찻길 정취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밖에 서울 구로구의 ‘항동철길’도 기찻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959년 개설된, 서울 오류동~경기 부천 옥길동을 오가던 비료 열차 철길(11.8㎞)의 일부 구간이다. 무료 개방되는 푸른수목원과 접해 있어 봄 경치 즐기는 나들이 코스로 선택할 만하다. 구로구청 쪽이 일부 구간에 야자수매트를 깔아 유모차도 오갈 수 있게 했다. 7호선 천왕역 2번 출구에서 5분 거리 네거리에 철길 들머리가 있다. 주택가와 수목원 담장을 따라 철길이 이어진다. 단, 이 철길은 폐선로가 아니다. 1주일에 1~2회(주로 야간에) 군수용 화물열차가 다닌다.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