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 직책에서 사임하겠다는 뜻을 적어 내는 문서.(표준국어대사전) 사표 이야기는 직장인에게는 일상이다. 어떤 직장인이든 사표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 일터에 완벽하게 만족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한국인 직장인들에게 사표는 항상 마음에 품고 있는 은장도와 같은 것이다. 생존을 위해 무한경쟁에 내몰린 직장인들의 정신적인 순결을 지키기 위한 은장도.
사표가 주제인 수다는 우울하기 마련이다. 사표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되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사표를 내고 싶은 의지가 생기는 상황이거나, 회사에서 사표를 내라고 강요한 상황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어느 이유이거나 괴롭고 힘든 일이다. 그리하여 반기를 든 사람들이 있다. ‘사표를 내는 행위’에 덧입혀진 우울함을 걷어내고자 시도를 하는 전 직장인들이 있다.
모든 직장인이 ‘사표 제출 의식 행위’를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발칙하고 유쾌한 이 행위는 사표를 낼 예정인 또는 내고 싶은 직장인들에게 일말의 희망을 안겨준다. 대책 없는 사표라도 좋다. 그 사표가 당신이 당신다워질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준다면.
출판사에 다니던 신미경(30)씨는 지난 7월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비정기 간행물 <사표> 첫호를 냈다. 퇴직금 수백만원을 탈탈 털어 잡지를 냈다. 그 책의 제목이 <사표>이다. 신씨는 정규직으로 있었던 첫 직장에 1년을 다녔다. 사표도 처음 내본 셈이다. 오죽이나 회사에 불만이 많았으면 잡지까지 냈을까 싶었다. 오해였다. “사표라는 책을 쓰게 된 건 두가지 이유가 있어요. 제가 도전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거든요. 그리고 독립출판물 잡지를 만드는 강좌를 들었는데 마치면서 잡지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있었어요. 그래서 도전한 거죠.”
아무리 도전과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고 해도 ‘사표’라는 주제가 우리에겐 괴로운 주제 아니던가? “맞아요. 사표라는 상징이 우울하죠. 내가 날마다 가던 곳이 없어진다는 사실이 불안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걸 우울하지 않게 재미있게 마무리하고 싶었어요.” 잡지의 표지에 실린 이미지도 ‘어두움’과는 거리가 멀다. 산뜻한 노란색 바탕에 사표, 그리고 사표 안에는 여권과 비행기표가 함께 들어 있다. 자신을 일부분 포기하고 살아가는 직장인들에게 사표는 나를 찾는 여행의 출발이 되기도 한다.
많은 직장인들이 일상적으로 사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어떤 직장인이 통쾌하게 사직서를 써서 냈다느니 하는 내용을 갖고 잠깐 자조적으로 웃을 뿐이다. 반면 공론의 장에서는 어느 누구도 사표나 사표를 낼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좀 문제있다 느꼈다는 신미경씨. “사표에 대해서 힘든 점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재취업에 대한 다양한 경로가 없는 사회,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현실 이런 것들로도 이어지더라고요.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이렇게 여럿이었나 싶고. 잡지를 만들고 또 창간하면서 인터뷰해 보니 사표에 대해서 조금 더 공론의 장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어요.”
신씨가 사표를 낸 과정을 듣자니 좀 부럽다. 회사에서도 인정받았지만 제 발로 나왔단다. 다녔던 회사에도 감사한 마음이라고 신씨는 말했다. 하지만 사표를 낸 뒤의 고난은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다. 이직할 직장을 알아둔 것, 떠나서 공부할 곳을 마련해 둔 것도 아니다. 제주도에서 한달 동안 여행을 했고, 9월 중순에는 런던에 10여일 정도 머물 예정이다. “돈도 떨어져 가고 있거든요. 이직할 곳을 찾아봐야죠. 하지만 <사표>를 만들었을 때와 만들기 전의 마음가짐은 확실히 달라진 것 같아요. 더 이상 막막하게 두렵지는 않네요. 이직도 역시 새로운 도전이니까요.” <사표>는 직장생활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인기가 많단다. 지금은 온라인서점 알라딘에서 살 수 있다. 그리고 신씨가 다음 사표를 내 퇴직금이 생기면 그때 <사표> 두번째 호를 만날 수 있단다.
잡지 <사표>의 표지와 꼭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사표의 달인 지명우(가명·35)씨이다. 그에게 사표란 ‘일상으로부터의 주기적 탈출’과 같은 말이다. 지명우씨는 비정규직 시절을 포함해 사회생활 8년 동안 3번 사표를 냈다. “첫 직장에서였어요. 깨달음 같은 건 없었어요. 그런데 사표 내는 것을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주변은 항상 ‘잘릴’ 걱정에 떨었어요.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세상이 바뀌면 참 좋았겠죠. 쉽게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요.” 지씨는 불안한 직장생활에 한가지 생명줄 같은 것이 사표를 내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언제나 떠날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직을 해야 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다음 사표 낼 기회도 없어져요. 그런 걸 고려한다면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 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죠.”
세번 사표를 낸 뒤 그는 항상 6개월 동안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여행 때마다 하나의 대륙을 정해 떠났다. 지금까지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서유럽을 가봤다. “다른 직장 동료, 친구들과 만났을 때 사표 이야기는 잘 안 꺼내요. 저에게는 설레는 주제지만, 그 친구들에게는 고통이거든요. ‘이렇게 사표를 즐기는 방법도 있어’라고 이야기해본 적도 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요. 저는 속으로 사표 내는 기회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할 뿐이죠.” 그는 네번째 사표를 1년 뒤에 낼 예정이다. 흔들림 없다. “요란스러울 필요 없어요. 차분히 맡은 일을 열심히 하다가,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그 느낌이 올 거예요. 놓치지 마세요. 그게 직장생활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올 수도 있는 기회니!”
글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표지디자인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