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운명의 날이 그렇듯, 그날은 불시에 찾아왔다. 카드 사용액이 월 한도의 90%에 이르렀다는 문자를 받은 서박하(필명·40)씨는 충격과 혼돈에 휩싸였다. 통장을 여러개로 나눠 돈을 관리하는 ‘통장 쪼개기’나 매달 적금 개수를 늘려가는 ‘적금 풍차돌리기’도 열심히 해왔건만, 무엇이 문제일까? 그때부터 ‘마이너스 인생’을 청산하려고 ‘소비단식’(Spending Fast)을 결심했다.
소비단식은 1년 정도 기간을 정해 의식주처럼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소비 말고는 거의 돈을 쓰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극단적 무소비 체험기 <나는 빚을 다 갚았다>를 쓴 미국인 애나 뉴얼 존스가 제안한 방법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씨는 이런 방법으로 2020년 2월20일부터 2년 동안 ‘소비단식’을 완주했다. 빚은 다 갚았고, 저축을 시작했으며, 자신의 경험을 엮은 책 <소비단식 일기>(휴머니스트)를 펴냈다. 한 스타트업 기업의 마케터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현재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에 살고 있다. 그 곡절 많은 이야기를 전자우편을 통해 나눴다.
―카드값에 충격받아 ‘소비단식’을 시작하셨다고요?
“처음엔 며칠 하다가 말면 어쩌나, 중도 포기한다는 자괴감에 빠져 악순환이 반복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지금은 완주를 했다는 것에 가장 큰 자부심을 느껴요. 제가 박사학위(경영학)를 땄지만 중간에 포기하려고 했던 적이 여러번 있었고 뭐든 끝까지 마무리를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요?
“내 노력이 하찮게 느껴지는 순간 고비가 찾아왔어요. 다이어트처럼 원래 소비형태로 되돌아가는 ‘요요’도 있었고 빚을 내서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빚투’에도 빠졌어요. 소비단식을 하다 보면 이른바 ‘현타’가 오는 순간이 있어요. 편의점에서 물 한병 편하게 사 마시지 못하는 순간을 잘 견디지 못하면 ‘그냥 편하게 쓰자’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빚투도 비슷했어요. 투자로 순식간에 불어나는 돈을 경험하면 내 노력이 너무 하찮게 느껴져요. 그때 고비가 찾아왔습니다.”
―고비를 어떻게 넘기셨나요?
“글쓰기가 큰 도움이 되었어요. 왜 이런 고비가 왔을까, 생각하고 글로 정리할 때 저 자신을 직면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서박하씨는 불필요하게 소비하는 습관의 진짜 이유를 찾으려고 치밀하게 스스로를 파고들었다. 박사과정, 논문 쓰기, 결혼과 출산, 육아,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남편 직장 때문에 케냐와 한국을 오가고, 코로나가 터져 기약 없이 발이 묶이고…. 휘몰아치는 인생 이벤트 속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소비단식을 하며 ‘내면아이’의 결핍을 알아챘고, 불안과 우울의 정체를 만났다.
[%%IMAGE3%%]―처음 소비 습관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건 언제였을까요?
“대학생 때, 21살 정도부터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사실 내 안에 결핍이 있었는데 그걸 자꾸만 소비로 채우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고등학교, 대학교 때부터 주변에 부유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너무 부러웠어요. 흉내를 내려고 하다 보니 제 수준과 차이가 많이 나는 소비를 하게 되는 거죠. 소비단식 계기가 된 ‘카드값 500만원’ 이전에도 여러번 습관을 바꾸려는 시도를 했는데, 차이는 ‘소비단식 일기’를 쓰느냐 마느냐였어요. 일기를 쓰면서 확실히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생겼습니다.”
―쇼핑으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구매-쇼핑 장애’(BSD, Buying-Shopping Disorder)라는 진단명이 있다고요?
“세계보건기구 국제질병 분류의 임시 범주에 포함돼 의학적으로도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고 해요. 그걸 알게 되자 ‘역시 나만 이런 것이 아니었어’라는 안도감과 함께 경각심이 들었어요. 제가 공부를 좋아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더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좀 신이 나기도 했어요. 소비단식 기간에 병원에서 우울과 불안장애 치료를 함께 받았는데, 그것이 좋은 선택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IMAGE4%%]―경험을 바탕으로, 불안과 소비의 상관관계를 말씀해주신다면요?
“불안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하는 상태가 아닐까 해요. 내 불완전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게 될 때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쇼핑이었어요. 아마 가장 약한 부분들을 추구하게 되겠죠. 누군가는 그것이 출세나 명예를 좇는 것일 수 있고요.”
―소비단식으로 깨달음까지 얻으신 것 같아요.
“왜 이 물건이 필요한가, 이 물건은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환경이나 인권의 문제를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소비단식을 하면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온전한 나’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말 앞으로 인생에서도 놓치고 싶지 않은 슬로건 같은 것이에요.”
―한국 사회의 소비주의는 심각한 수준인 것 같아요. 외국에서는 어떻게 느끼세요?
“제가 많은 나라에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한국은 공항에서부터 느껴지는 긴장감이 있어요. 특히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서로를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매우 높다고 느껴요. 너무 작은 도시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 맞대고 살아가고 있고 경쟁이 심한 사회여서 그런지 서로를 짧은 시간에 파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인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더 소비를 통해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화폐와 금융에 관한 지식이 있었기에 소비단식을 2년이나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경영학 박사이고 금융 관련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기는 하지만 화폐와 금융에 대한 지식은 일반인 정도라고 생각을 해요. 하지만 누구나 ‘돈 공부’는 필수적인 것 같아요. 절약과 돈 모으기같이 아주 쉬워 보이는 것들도 공부 없이는 지속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적금과 저축이 ‘티끌 모아 티끌’이 아닌 ‘눈덩이’를 만들어가는 가장 큰 원천이 된다는 것도, 공부를 하면 더 직접적으로 알게 되어요.”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나 자신을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소비단식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이렇게 행동하는 나를 직면하는 것이었어요.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 왜 이렇게 돈을 쓴 걸까, 고민하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 두려웠는데 막상 대면하고 나니 극복하는 것은 그보다 수월했어요. 자신을 다그치지 않고 알아가며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소비단식을 소비를 단순히 줄이는 과정이 아닌,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작고 확실한 성취는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소비단식 일기는 가장 좋은 방법!2 소비를 분석하고 이유를 파고들자
―쇼핑은 때로 우울과 관계가 있다. 온라인 서점을 도서관처럼 여기지 말고, 생필품도 ‘쟁여두기’ 하지 않는다.3 정리를 한다
―잊고 있던 옷, 생필품, 냉장고 안 식품을 발견할 수 있다.4 결제를 어렵게 하자
―체크카드를 쓰고 모바일 결제 앱을 지워 결제에 허들을 만든다.5 소비를 미루자
―하루를 참으면 일주일을 참을 수 있다.6 포기하지 말자
―가장 중요하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