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어진 부산의 대안 공간 ‘생각다방 산책극장’, 육칠년 전 이곳에서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서영씨를 만나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생각을 나누었다. 김비씨 제공
지금은 없어진 부산의 대안 공간 ‘생각다방 산책극장’, 육칠년 전 이곳에서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서영씨를 만나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생각을 나누었다. 김비씨 제공

사람에게는 모두 이름이 있지만 나에게는 그 이름이 몇개 더 있다. 물론 부모가 준 이름에서 내가 선택한 이름으로 개명을 하기도 했지만, 어떤 이름은 내가 원치 않는데 내내 달고 다녀야 했다. 어느새 오십이 된 지금 나이에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고 버성긴 이름.

오직 사람만을 환대한 시간

처음에는 세상이 정해준 이름에 나를 맞추어 살다가, 온 힘을 다해 맞추어 살다가 나는 오히려 나를 잃고 궁지에 몰렸다. 가까운 사람들마저 약을 내밀고, 병원 이름을 내밀고, 세상의 관념은 나를 ‘틀린 것’이라고 간단히 규정했다. 내가 십대, 이십대 시절을 보냈던 1980~90년대에는 그랬다. 선택지는 두가지일 뿐, 하나의 성별을 포기하는 일이 곧 다른 성별을 택하는 일이 되어버렸고, 나는 둘 중의 하나가 되기 위해 참 많이도 버둥거렸다. 지금이야 다양성을 존중하는 일이 범세계적인 추세가 되었고, 그러한 흐름 덕분에 사람들이 ‘존중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절에는 모든 인간을 비슷하게 만드는 데 온 사회가 몰두해 있었다. 목표 지향적인 시스템이 대부분 그러하듯 인간은 도구가 되고, 도구는 활용하기 편리할 때에만 그 존재 의미가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오랜 시간 애를 써서 결국 이 사회에 그럴듯한 도구로 다시 탄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나이 오십이 되었지만 나는 ‘쓸모있는 도구’라기보다는 서랍 속 어딘가에 처박아두고 잊어버린, 용도를 알 수 없는 ‘휘어진 것’에 불과했다. 벽에 붙이는 건가 벽에 대보았다가 사람 난감하게 만들고, 물건을 거는 건가 고리를 걸었다가 금세 바닥에 떨어뜨리고 마는 정체 모를 물건. 결국,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왔거나 부러진 조각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쓸모없음’의 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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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칠년 전 부산의 한 대안 공간인 ‘생각다방 산책극장’에서 중학교 2학년이던 서영씨(서영‘양’이 아니다)라는 이름의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여행 좋아하고 음악 좋아하는 두 여성 청년이 만든 공간은 나도 당시 사귀고 있던 지금의 내 신랑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백수들의 실험실’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지닌 그곳에는 거의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초대되었다. 심지어 초대되지 않은 사람도 그곳을 찾아 낡은 주택의 마루턱에 앉아 한나절 햇볕을 쬐다가 조용히 돌아가기도 했다. 학생이기도 하고, 취업 준비생이기도 하고, 직장을 다니는 직장인이기도 하고, 예술가이기도 하고, 성 소수자이기도 한 그들에게 그곳의 자리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원하는 때에 찾았다가 원하는 자리에 원하는 만큼 머물다가 가면 되는 일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나는 서영씨를 만났는데 그녀는 자신의 또래 친구와 같이 찾아왔었다. 나는 아직도 그 자리의 풍경을 기억하는데, 갖가지 이유로 ‘백수’였던 그곳에 모인 모두는 아마도 열다섯 나이에 그런 곳(?)을 찾은 그녀를 향해 모종의 부러움, 질투, 혹은 존경의 눈빛을 보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책을 읽거나, 서로의 책 읽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우울을 나누거나, 같이 끼니를 때우고 정말 쓸모없는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흩어져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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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받은 것이 충고나 조언 따위는 아니었다. 오히려 가만히 듣는 일이었고, 서로 다른 자리에 있는 자신의 삶을 발화하며 자신을 새롭게 기록하는 자리였다. 그곳에 모두는 사회적인 이름들을 배제한 채 오직 눈앞에 보이는 사람만을 환대하며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고 그 시간을 즐겼는데, 마흔 후반에 접어들며 나는 그때 그 시간이 자주 그리워졌다. 마흔 중반인 나와 열다섯인 그녀가 ‘서영씨’ ‘김비씨’라고 서로를 부르며 서로의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서로의 삶을 응원했던 그 나날들이. 갖가지 이름들을 휘장처럼 두르고서, 존중받는 일과 존중하는 일이 결국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을 깨치지 못한 채, 등 돌린 서로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이토록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시대 속에서.

2020년 올해로 딱 오십이 되던 첫날, 나는 일어나자마자 신랑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우와 오십이다!’ 두 손 번쩍 들어 외쳤다. 신랑은 나의 오십에 박수를 쳐주었다. 누군가에게 오십은 쓸쓸한 나이인지 모르지만 나에게 오십은 ‘트로피’였다. 대단한 걸 이뤄서가 아니다. 온전히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트로피’였다. 나는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오십을 꿈꾸어본 적이 없었다. 마흔까지는 아등바등 살아지게 될까, ‘트랜스젠더의 늙은 몸’이 어떤 것일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알 수 없으니 두려운 것일 뿐이었다. 혼자든 누군가 곁에 있든 고립되거나 자학하지 않고 오십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나는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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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대안 공간 ‘생각다방 산책극장’에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모였고 때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김비 제공
부산의 대안 공간 ‘생각다방 산책극장’에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모였고 때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김비 제공

겨우 오십 나이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육십이나 칠십에 지금의 나를 온전히 지키고 있을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리 건강한 몸이 아니었고, 힘든 수술을 겪은 만큼 최선을 다해 나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며 지냈다고 믿었는데 그것만으론 부족했음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온전함이란 행운이거나 시간의 선물일 뿐 자동차 바퀴처럼 닳아지고야 마는 것이 인간의 육신임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고달픈 몸은 아무리 근사한 수사를 끌어오더라도 고달픔일 뿐, 자책이나 회의감이 아닌 다른 것을 떠올릴 수 있을까, 어느새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기에. 십년이든 이십년이든 지금 시작해야 이름 없던 내 삶의 ‘쓸모없음’을 그나마 최대치의 의미로 남겨놓을 수 있을 것이기에.

휘어진 내 삶을 가만히 만져본다. 매끄럽지 않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돌기로 가득한 모서리를 손바닥 살에 문질러본다. 날카로운 통증에 비명 지르지 않고 조용히 그 통증을 생각한다. 나를 아프게 했던 것들을 생각한다. 이름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빼앗겼거나 지워졌거나, 모호하고 흐릿한 이름을 지닌 모두를 생각한다. 버티고 살아남은 그 안간힘을 위해 소리 없는 찬사를 마음속에 되뇌어본다, 기록한다.

자연스럽게 오는 것, 애써 오는 것

소중한 이 지면에 앞으로 적게 될 이야기가 내 삶에 자연스럽게 온 것들에 관한 것일지, 애써 얻은 것들에 관한 것일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적으려 한다. 애써 기록하려 한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알 수도 없는 ‘서영씨’에게 안부를 전하듯, 어떤 이름을 지닌 생이더라도, 혹시 모호하고 흐릿한 이름을 지닌 채이더라도 오십의 나는 여전히 반가운 목소리로 ‘서영씨’를 불러야 한다고 믿기에. 지금 어떤 이름을 지녔든 우리 서로의 이름 부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믿기에.

덧. 고백하건대 성 확정 수술을 받고 법적 성별도 바꾸었지만, 지금까지 ‘트랜스젠더’라는 이름조차 단 한번도 내 것 같지 않았음을 밝힌다. 영 어색하고 부대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남녀’가 같이 붙은 한자 ‘호’(好)를 새로운 나의 이름으로 쓰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적을 이야기의 제목은 ‘달려라, 오십호(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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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