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들이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사 앞에서 열린 ‘혐오와 차별 해소를 위한 각 정당의 입장에 대한 질의서’에 대한 응답을 촉구하는 항의 집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들이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사 앞에서 열린 ‘혐오와 차별 해소를 위한 각 정당의 입장에 대한 질의서’에 대한 응답을 촉구하는 항의 집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숱한 여성혐오적 악플(악성 댓글)에 시달리던 배우 설리(25·본명 최진리)가 지난 14일 세상을 등진 뒤 ‘인터넷 댓글 실명제’나 ‘악플 금지법’ 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벌써 여론을 등에 업고 관련법 심의 요구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악용 가능성이 큰 ‘인터넷 댓글 실명제’나 ‘악플 금지법’보다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차별금지법 논의를 본격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1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최진리법을 만들어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네이버나 다음 카카오 등 포털 내 기사만큼은 댓글 실명제를 활용할 것, 기자들이 프라이버시 침해나 사실관계가 불분명한 기사를 쓰면 해당 기자 자격을 정지하는 벌을 줄 것” 등을 요구하는 청원이다. 이 청원은 17일 오후 6시 현재 1만6000여명의 동의를 받았다.

정치권에서도 목소리가 나왔다. 대안정치연대는 지난 16일 김정현 대변인 논평을 통해 “가수 설리의 죽음을 계기로 악플방지법 제정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타당하다”며 “이미 개정안이 나와 있는 상황에서 국회는 이와 관련된 논의조차 없었다. 관련 상임위는 즉각 관련법 심의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2017년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이 포털과 게시판 댓글에 인터넷 실명제 도입을 주장하는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고, 같은당 박완수 의원도 인터넷 등에서 상대를 모욕할 경우 형법상 모욕죄보다 강하게 처벌하는 내용을 담은 같은 이름의 법률 개정안을 냈다. 이 법안들은 현재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 계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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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앞서 2012년 헌법재판소는 본인 확인 절차를 거쳐야만 게시판을 이용할 수 있도록 본인확인제를 규정한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대해 사회적 약자 등의 표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고 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크다는 등의 이유로 위헌 결정을 했다. 성동규 중앙대 교수(신문방송학)도 “자칫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고 다수의 누리꾼들을 가상의 범죄자로 미리 매도할 수 있는 우려가 커서 헌재에서 위헌 결정이 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넷 실명제가 실효성도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미 페이스북 등과 같이 실명 기반 에스엔에스(SNS)에도 악플은 쏟아지고 있고, 아이디를 도용해 악플을 달 수도 있다. 한상희 건국대 교수(법학)는 “악플을 다는 사람들은 자기 신원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자기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한국은 지금 현재도 댓글 그 안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없을 뿐 누가 댓글을 달았는지 거의 대부분 추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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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설리 사망 이후 2030 여성들 사이에서 설리를 향해 쏟아졌던 다양한 비난의 목소리가 사실은 같은 세대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고 있는,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허용해온 일들’이라는 공감대가 확산하면서 분노를 쏟아내고 있는 현상에 좀 더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관련 기사 : “설리가 우리다” 2030 여성들의 공감과 분노) 한 교수는 “(설리에게 쏟아진) 탈코르셋, 노브라 등에 대한 비판은 명백한 혐오표현”이라며 “혐오표현에는 개인과 개인이 지닌 소수자성에 대한 두가지 공격이 수반된다. 대부분 악플이 설리 개인에 대한 비난인 동시에 설리에게 귀속된 여성이라는 속성에 대한 공격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차별금지법 제정에 좀 더 논의를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차별금지법이 20대 국회에서 발의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대 국회에서는 김한길 민주통합당 의원 등이 발의했으나 보수 개신교계의 반대로 곧 발의를 철회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차별금지법과 관련한 논의를 진행하지 않고 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글로벌 커뮤니케이션학)는 “설리의 경우 연예인인데다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이나 혐오 발언들에 시달려 왔다”며 “일단 댓글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 포털과 언론이 댓글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혐오와 차별 발언을 금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할 수 있도록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는 “개인에 대한 악플 등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이나 모욕 등 기존 법을 활용해서 규제할 수 있다. 다만 여성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비하 발언에 대해서는 혐오표현에 관한 별도의 근거 법규 마련이 필요하다”며 “차별금지법을 제정해 차별과 혐오에 대한 종합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광준 오연서 기자 ligh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