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6일 국회 정론관에서 베트남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씨가 당시 상황 등을 설명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2015년 4월6일 국회 정론관에서 베트남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씨가 당시 상황 등을 설명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우리는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던 우리의 가족들이 한국군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목격하였고, 한국군의 총과 수류탄을 피해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목격자이자 생존자입니다.”

응우옌티탄(59)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이다. 만 7살 때 베트남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에서 한국군에게 가족을 잃고 왼쪽 옆구리에 총을 맞고 살아남았다. 그날 하루에만 74명의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한국군은 1964년 9월부터 1972년까지 31만2천여명을 베트남에 파병했는데 이 기간 동안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80여건, 피해자 수는 9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 4월4일 응우옌티탄을 포함한 103명의 피해자들은 학살 피해에 대한 진상조사와 공식사과, 피해회복 조처를 요구하며 한국 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여러 번의 계기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여전히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사과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 역시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인 베트남인들이 대한민국 국가기구에 제기한 최초의 청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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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답변기한인 90일을 훌쩍 넘긴 지난 9일 국방부가 뒤늦게 청원에 대한 답변을 내놓았다. “국방부 보유 자료에서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고, 한국 쪽의 단독 조사가 아닌 베트남 당국과의 공동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나, 한국-베트남 정부 간 공동조사 여건이 아직까지 조성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내용이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반발했다. 예의를 갖춘 여러 표현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이 왜 자신의 가족을 죽였는지, 왜 나를 쏘았는지 밝혀달라’는 피해자들의 요구를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거부했다는 것이다. 한베평화재단, 베트남과한국을생각하는시민모임 등 60곳의 시민사회단체는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역사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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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12일 베트남 퐁니 퐁넛 마을의 비극을 미군 해병 본 상병이 촬영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1968년 2월12일 베트남 퐁니 퐁넛 마을의 비극을 미군 해병 본 상병이 촬영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이들은 국방부 답변의 문제점을 크게 2가지로 지적했다. 먼저 이들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은 전쟁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인데 이러한 대규모 전쟁범죄가 한국군 전투 사료에 그대로 기재되어 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지적했다. 국방부가 ‘보유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니 학살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가범죄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는 답변이라는 얘기다. 더구나 국가정보원이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3년째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 조사자료 ‘목록’조차 공개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국방부가 ‘관련 기록이 없다’고 회신한 것을 신뢰하기도 어렵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들은 이 밖에도 한국 정부가 베트남 당국과의 공동조사 이전에 한국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문서들, 미국이 보관하고 있는 문서들을 대상으로 1차적인 진상조사를 진행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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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정부에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을 따르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일본의 식민지 시기 불법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며 견지하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부차적인 것이 되는 것이냐”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최소한 청원인 103명이 진술한 사건에 대해서라도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정부 공식 조사기구 설치 △조사 결과 한국군의 위법행위가 존재했다고 볼 가능성이 확인될 경우, 피해자에게 공식사과 및 해당 지역에 위령 사업 등 피해회복 조처 실시 등을 정부에 요구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