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궁이 아니다.” “형법 제269조 1항 폐지하라.”
빗방울이 떨어지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씨 속에 1500여명(주최 쪽 추산)이 우비를 입고 모여 ‘낙태죄 위헌’, ‘낙태죄 폐지, 새로운 세계’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었다. 23개 시민사회단체 연대체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공동행동)이 30일 오후 3시30분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낙태죄 위헌 결정’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다음달께 있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관련 헌법소원 선고를 앞두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기 위해서다. 헌법재판소는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제269조 1항과 제270조 1항의 위헌 여부에 대한 심리를 진행하고 있다.
공동행동은 이날 집회에서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전면 비범죄화 △포괄적 성교육과 피임 접근성 확대 △유산유도제 도입을 통한 여성건강권 보장 △우생학적 모자보건법 전면 개정 △낙인과 차별 없는 재생산권 보장 등을 요구했다.
집회에 참가한 전남대 페미니즘학회 ‘팩트’ 소속 수진은 “정부가 여성을 한 집단으로만 묶은 뒤 단지 자궁을 가진 존재,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며 “결혼 여부나 성별, 연령에 상관없이 누구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출산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권혜진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교육공무직본부 사서분과장은 “어제 케이티엑스(KTX) 화장실에서 탯줄이 그대로인 채 사망한 신생아가 발견됐고, 오늘 오전 충주의 한 지구대에서 대학생이 자수했다”며 “이 대학생은 영아유기죄로 입건돼 2년 이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씨는 “피임을 요구할 권리가 제대로 보장됐다면, 그리고 임신을 알았을 때 당사자가 온전히 결정할 권리가 보장됐다면 이러한 비극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집회에서는 특히 낙태죄 문제에 있어 뜻하지 않은 임신의 피해를 홀로 감당하는 10대 여성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19살 나이에 낙태한 경험이 있다는 라일락은 “당시 집에서 나온 상태에서 부모님께 말을 할 수 없어 20살인 지인의 신분증으로 임신중절 수술을 했다”며 “당시 제가 겪었던 어려움과 문제들, 차별들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튜브로 피임 영상을 보고 처음 낙태죄 폐지 집회에 참여했다는 은선(19)은 “여성 청소년은 보호 대상이기 때문에 성적 주체로 보지 않는다”며 “낙태죄 문제에서 여성 청소년이 온전한 주체로 논의에 포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집회에 함께 나온 연인도 눈에 띄었다. 여자친구와 함께 집회장을 찾았다는 이수호(22)씨는 “낙태죄가 가임기 여성을 자유로운 성관계를 가질 수 없게 만든다”며 “형벌이 여성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같이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공동행동은 오후 4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헌법재판소가 있는 안국역 사거리까지 갔다가 다시 집회 장소로 돌아오는 행진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편, 같은 시간 공동행동 집회 맞은편에서는 낙태죄 폐지 반대를 요구해온 41개 시민단체가 모인 ‘낙태죄폐지반대국민연합’이 서울 종로구 원표공원에서 낙태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낙태죄는 합헌”이라고 외쳤다.
이날 집회에 참여한 500여명(주최 쪽 추산)의 시민들은 ‘태아는 생명이다’, ‘낙태법 유지는 생명 존중’ 등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낙태 반대’를 촉구했다. 집회에 참여한 이신희 나쁜인권조례폐지네트워크 대표는 “작년에 다섯째가 태어나 우리 집에 다섯명의 보물이 있다”며 “이기적 생각과 육체적 쾌락 때문에 생명이 짓밟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이어 ”요즘 양육비와 아동수당으로 매달 30만원이 들어올 만큼 복지가 아주 잘 돼 있다”며 “아이 키우는 환경이 훨씬 좋아졌다”고 강조했다. 집회에 참여한 임수정(27)씨는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을 자의적으로 없애는 것은 죄라고 말했다”며 “범죄적으로 노출됐거나 아이가 장애인인 경우가 아닌데도 아이를 낳을 때가 아니라며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오히려 여성의 인권을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헌재는 이르면 다음달 초 ‘낙태죄’ 조항에 대한 위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임신한 여성이 낙태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한다는 내용의 형법 269조 1항 ‘자기낙태죄’와 의사가 임신한 여성의 동의를 받아 낙태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하는 270조 1항 ‘동의낙태죄’가 대상이다. 헌재는 2012년 이 조항들을 재판관 4대 4 의견으로 합헌 결정한 바 있다.
권지담 기자 gonj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