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적 망신과 국내적 공분을 일으킨 예천 군의원의 추태는 한국에 풀뿌리 민주주의의 뿌리가 얼마나 허약한 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민들이 군의원을 대신해 국민에게 사과하는 진풍경을 연출한 예천군 사태를 보는 한국자치학회 전상직(64) 회장은 군의원 후보를 정당이 공천하는 제도가 이번 사태를 초래한 근본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주민들의 자치력이 없으니 정치적 이유로 공천된 군의원들이 수준 이하의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전 회장은 내친김에 이야기한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읍·면·동의 장이 되어서 지역행정을 책임지는 나라는 한국이 오이시디(OECD) 회원국 가운데 유일합니다.” 국가 권력이 공무원을 대상으로 동장을 임명하는 현 제도가 풀뿌리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로막는 적폐라는 것이다. 일제가 식민지를 수탈해 전시동원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제도를 지금껏 이어가고 있는 부끄러운 단면이라는 것이다.
개인사업을 하면서도 20년 가까이 ‘뚝심’으로 주민자치를 연구해온 전 회장을 지난 9일 서울 인사동 한국자치학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읍면동장 임명제’ 일제 때부터 적폐
‘이웃사촌 수평적 자치 전통’ 파괴해
‘주민자치위’ 20년 지나도록 하부조직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관료 편향일 수밖에”
오늘 ‘주민자치 실질화 대토론회’ 열어
“대통령 ‘풀뿌리 민주주의’ 공약 지켜야”
한국자치학회는 오는 16일 국회대강당에서 ‘제6회 주민자치 실질화 대토론회’를 연다. 전 회장은 먼저 한국 주거형태에서 사라져버린 수평관계를 아쉬워했다. “전통의 한민족 촌락에서는 수평적인 관계가 활성화돼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웃이 사촌이었죠. 집값이 천냥이면 이웃 값은 만냥이라는 말이 상식이던 시절이었습니다. 향약, 두레 같은 마을의 자치 조직은 매우 민주적이면서 공공성이 높았습니다.”
그런 자치조직은 일제 강점기에 파괴됐다. “일제가 면(面)이라는 행정단위를 새로 만들어 면장을 임명하고, 각 면소재지에 주재소를 두어서 헌병을 파견합니다. 항일 독립 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만든 겁니다.”
그렇게 말살된 주민자치는 해방공간의 혼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그대로 방치됐다. 그뒤 산업화 시기에는 도시로 인구가 몰려들자 대규모 동(洞)의 임명제 동장이 행정의 일선에 섰고, 민주화 시기에도 풀뿌리 민주주의는 늘 뒷전으로 밀렸다. 전 회장은 도시화 과정에서 지역사회의 생활공동체 활동은 주택의 문제로만 접근됐고, 전통사회의 미덕은 성장 논리에 밀려 해체되고 소비돼 버렸다고 진단했다.
“지금의 읍면동장제처럼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지 않고 임명되는 관료는, 주민들보다는 자신을 임명한 단체장과 동료인 관료들의 시각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현 정부의 주민자치 정책에 대해서도 전 회장은 혹독한 비판을 한다. 의지가 없을 뿐 아니라 주민자치를 정치화하려는 시도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획기적인 분권을 하겠다고 공약도 하고 국정지표로도 발표했습니다.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정부의 분권 역량도, 분권 의지도 부족해보여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비판 수위가 점점 높아진다. 그만큼 현실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는 제자리 걸음이라는 이야기이다. 주민자치에 대한 연구도 부족하고, 주민자치 현장 조사도 부족하고, 주민자치의 주체인 주민에 대한 이해도 절대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지난 1999년 주민자치위원회가 출범했지만, 읍면동장의 하부조직이 되면서, 자치위원이 사실상 읍면동장의 행정적인 하수인으로 전락했다고 그는 꼬집는다. 읍면동장이 위촉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주민 주도로 마을 일을 해결하려는 주민자치는 시작도 못했고, 경험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전 회장은 서울시의 ‘서울형 주민자치회’도 ‘주민’과 ‘자치’가 없긴 매한가지이고, 게다가 지원관이란 제도를 만들어 주민자치를 파행적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서울시는 주민자치회 틀을 짜고 지원을 하면 되는데, 구청마다 주민자치 지원관이란 자리를 2명씩 배치하며 주민자치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며 “동에도 주민자치 담당관이란 직책을 만들어 주민자치회를 무력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대기업에서 근무하다가 독립해 개인 사업을 해온 전 회장은 김대중 정부 때 읍면동에 주민자치센터를 만드는 것을 계기로 주민자치 연구를 시작했다. 참여연대의 참여사회연구소 이사장도 지냈다. 기업가의 길과 주민자치학자, 그리고 시민운동가의 세 길을 동시에 걷고 있는 셈이다.
“주민들이 이웃을 위하는 미덕이 마을의 공덕이 되고 나아가서는 지방의 공공이 됩니다. 그런데도 행정안전부는 왜 주민자치회에서 주민도, 자치도 빼려고 하나요? 이제는 주민자치의 주체인 주민의 눈높이에서 주민자치의 지평을 확보해야 할 때입니다.”
이길우 선임기자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