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설씨가 지난해 받은 대학 합격통지서. 이름에 ‘김설?’라고 표기되어 있다. 김설씨 제공.
김설씨가 지난해 받은 대학 합격통지서. 이름에 ‘김설?’라고 표기되어 있다. 김설씨 제공.

‘합격통지서 / 성명: 김설? / 귀하는 2018학년도 수시 신입생 입학전형에서 공연학부(연기전공)에 합격하였음을 통지합니다.’

올해 서울예술대학교에 입학한 대학생 김설??20)씨는 대학 합격통지서를 받아들고 깜짝 놀랐다. 자신의 이름 마지막 글자가 ‘?’로 표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합격통지서뿐만 아니라 대학 출석부에도 ‘김설?’라고 표기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2학기가 지난 지금, 김씨가 학교 쪽에 요구해서 그나마 고쳐진 이름은 ‘김설므l’. 한글 ‘므’에 알파벳 ‘엘’(l)을 함께 표기했다. 출석부뿐만 아니라 대학 모바일 학생증에도 김씨의 이름은 ‘김설므l’라고 표기돼 있다.

김씨의 이름인 ‘설?脾? 지혜와 총명함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다. 흔히 쓰이는 단어 ‘눈썰미’가 ‘설’에서 파생됐다. 그러나 김씨는 본래 뜻과 상관없이 “이름 때문에 너무나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뿐만 아니라 은행·통신사 등 민간 전산시스템상 ‘?脾?遮 단어가 문자로 인식되지 않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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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은행에는 ‘김설PA’라고 입력해 겨우 계좌를 발급받을 수 있었고, 통신사에선 ‘김설미’라고 입력해 겨우 휴대전화를 개통했다. ‘김설?’, ‘김설므l’, ‘김설미’, ‘김설PA’ 김씨는 “성인이 돼 각종 전산시스템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삶을 살게 된 뒤 ‘설?貧 설?牝 부르지 못하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설?脾?遮 이름이 입력되지 않는 이유는 은행이나 통신사, 대학 등 민간에서 사용하는 대형 전산시스템의 한국산업표준(KS)이 ‘한글조합형코드’가 아닌 ‘한글완성형코드’(EUC-KR)인 탓이다. 완성형코드는 국제표준과 충돌이 적다는 장점이 있지만, 미리 조합되어 있는 글자 외의 문자는 인식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脾? ‘?큄 같이 빈도수가 낮은 문자들은 코드에 등록하지 않아 문자로 보지 못하는 셈이다. 이 완성형코드는 한글 초·중·종성으로 조합 가능한 한글 문자 1만1172자 중 2350자만 표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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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완성형코드를 사용해온 공공정보시스템은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2010년부터 모든 한글을 표현할 수 있고 다국어 처리가 가능한 ‘유티에프(UTF)-8’ 인코딩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은행이나 통신사와는 달리 주민등록상에는 ‘김설?脾 입력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민간시스템 중에는 아직 1987년에 정해진 한국산업표준에 따라 ‘EUC-KR’ 인코딩 방식을 사용하는 곳들이 많다.

문제는 민간 전산시스템과 주민등록의 이름이 달라 ‘본인인증을 하지 못해’ 받는 불이익이 크다는 점이다. 김씨는 올초 ‘입학금 지원 장학금’을 신청하려고 했는데, 한국장학재단 홈페이지에서 주민등록상 이름(김설??과 휴대폰 명의상 이름(김설미)가 맞지 않아 결국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 카카오뱅크 계좌를 개설하려 했지만 주민등록상 이름과 통신사 명의상 이름이 달라 만들지 못했다. “최근에는 사용하던 은행 계좌가 타은행과 거래가 안되더라고요. ‘또 이름 때문인가보다’ 했죠. 용돈을 벌기 위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월급도 부모님 계좌를 통해서 받았어요.” 김씨는 “타 은행에서 새로 계좌를 만들려고 했는데, 그 은행에서도 ‘?脾?遮 단어를 쓰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며 “계좌를 만들거나 휴대폰을 개통할 때마다 숱하게 ‘차라리 개명을 하는게 어떻겠느냐’라는 말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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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결국 지난달 25일 ‘제 이름 좀 지켜주세요’(www1.president.go.kr/petitions/389667)라는 제목의 청와대 청원을 올렸다. “개명 전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등본이나 신분증에서는 설?牝箚 잘 나오지만 은행, 학교, 의료보험, 휴대폰 등은 설미로 등록해야 하거나 특수문자로 뜹니다. 정말 특이하고 자랑스러운 이름인데 지금 생활에 불편함이 많습니다…저 좀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김씨가 올린 청와대 청원은 8일 기준 1천427명의 동의를 얻었다.

“전 제 이름이 정말 좋았어요. 아버지께서 좋은 의미로 제게 지어주신 이름이고, 특이한 이름을 가져서 너무 좋았거든요. 그런데 이름 때문에 너무 큰 불이익을 받고 있습니다. 개명하지 않고 순수한 우리말 이름을 지킬 수 있도록 하루빨리 제도가 개선되면 좋겠어요.”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