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사회일반

결혼 없이도 ‘법적 보호자’가 될 순 없을까

등록 :2018-06-17 09:27수정 :2018-06-17 09:55

[토요판] 이런,홀로!?
‘생활동반자법’을 기다리며

다친 애인 데리고 간 병원
이것저것 검사를 했지만
내겐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무슨 사이냐” “그럴 의무 없다”고

결혼해야 가능한 ‘보호자’ 역할
1인·한부모·비혼·동성애·노키즈…
‘정상 가족’이 아닌 이들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세상에는 ‘정상 가족’보다 더 많은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존재한다. 1인 가구, 한부모 가정, 비혼 가구,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 이주민 가정, 피나 결혼으로 묶이지 않은 채 함께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게이 커플, 레즈비언 커플 등.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한 형태의 가족 구성원, 동반자는 점점 더 늘어날 거다.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에는 ‘정상 가족’보다 더 많은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존재한다. 1인 가구, 한부모 가정, 비혼 가구,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 이주민 가정, 피나 결혼으로 묶이지 않은 채 함께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게이 커플, 레즈비언 커플 등.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한 형태의 가족 구성원, 동반자는 점점 더 늘어날 거다. 게티이미지뱅크

얼마 전 술을 먹다 애인이 다쳤다. 친구들과 우르르 모여 술을 마시다 애인이 너무 취해 술을 깨겠다고 둘이 밖으로 나간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둘이 깔깔거리며 술을 깨보자고 두 손을 맞잡고 이상한 체조를 하다 술이 너무 취했던 애인이 중심을 잃고 넘어져버렸다. 무릎이 땅에 먼저 부딪혔지만 몸을 제 맘처럼 가누지 못해 곧이어 팔과 머리까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파하는 애인과 함께 낄낄거리는데 갑자기 애인의 머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애인의 손으로 계속 떨어지는 핏방울을 지혈하며 집 근처 응급실로 달려갔다.

애인은 이미 엄청나게 취한 상태에서 다쳤다. 그래도 4년을 만났으니 이 정도 취했으면 어떤 상태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직접 접수를 하고 간호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응급실 보호자 목걸이도 건네받았다. 이내 애인은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다. 처음에 따라 들어가 다친 상황을 다시 설명했고 간단한 처치 뒤 애인은 혼자 검사를 받으러 어디론가 들어갔다.

이후 애인은 검사를 위해 여러 번 불려갔는데, 나에게 왜 이런 검사가 필요한지에 대한 설명이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없었다. 간호사에게 이유를 물었다. 지금 애인은 몸을 잘 가누지도 못할 만큼 평소와 달리 심하게 취한 상태고, 그래서 다쳤고, 이 상태에선 분명 술이 깨도 기억을 제대로 못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간호사가 환자분에게 충분히 설명을 했다고 하길래 이미 너무 취한 상태고 제가 봤을 때 분명 기억을 못 할 테니 보호자인 저에게도 후유증이나 문제 등을 계속 설명해주셔야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무슨 사이냐는 물음, 그리고 애인은 법적 보호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들에겐 그럴 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피를 나눈 가족도, 결혼 등의 서류로 묶인 가족도, 심지어 먼 친척조차 아니다. 법적으로 아무런 권한도 권리도 없고, 관계를 증명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내가 아무리 모든 상황을 목격했고, 애인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고, 평소에 가장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나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 의사와 간호사들 역시 정해진 병원의 룰과 매뉴얼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만약 이 상황이 좀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면? 만약에 애인이 아예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면? 많은 병원들의 수술동의서나 보호자 규정 관행이 그렇듯 부모나 배우자가 와야만 가능한 걸까.

그렇다면 반대로 나의 경우엔? 내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할 수 있는 그런 가족들은 아주 멀리 살고 있다. 보호자가 먼 지역에 살아 몇시간을 걸려 병원으로 와 서명을 할 때까지 수술을 못 했다거나, 수술을 받기 위해 가정폭력을 일삼았던 가족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거나 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난 비혼은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가부장적이고 가족주의가 전제된 제도에 굳이 들어가야 하는지 고민은 늘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새벽의 난리를 겪으면서 결국 답은 결혼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처치와 검사가 끝난 애인을 데리고 집으로 와 눕히고 사소한 것들을 챙기고 옆에서 잠들었다. 다음날 일어난 애인은 역시나 병원에서의 검사와 의사와 간호사가 이야기해준 주의사항이나 후유증 등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머리가 자꾸만 아프다는 애인을 옆에 두고 나는 초조하게 휴대폰으로 뇌진탕 후유증 따위를 계속 검색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진선미 의원은 2014년부터 ‘생활동반자 관계에 관한 법률안’을 시작으로 생활동반자 제도를 이야기해왔다. ‘생활동반자법’, ‘파트너등록법’, ‘동반자등록법’ 등 다양한 용어로도 불리는 그 법안은 반드시 혈연 또는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로 묶이지 않아도 서로의 생활에 의무와 권리를 가지는 ‘동반자’와의 법적 관계를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럽에는 이미 많은 국가가 이 제도를 시행 중인데, 2013년에 교환학생 생활을 했던 스웨덴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웨덴은 여러모로 복지국가이지만 의외로 여성의 결혼율이 약 60% 정도로 세계적으로도 낮은 편에 속했다. 그런데도 동네에서나 마트에서나 가는 곳마다 한국이라면 부부로 보일 만한 커플과 아이들이 넘쳐났다. 스웨덴 친구에게 물어보니 스웨덴에는 ‘삼보’(Sambof?rh?llande)라는 파트너등록법이라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진선미 의원이 발의했던 법률안처럼 삼보 역시 결혼이라는 제도와 유사하게 동반자로서의 권리와 혜택을 보장한다. 삼보 제도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서로가 법적 보호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제도를 시행했던 프랑스에서도 결혼율 감소를 걱정했었지만 시행 이후 결혼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거나 결혼율이 감소하지 않았다. 스웨덴의 거리 풍경과 프랑스의 통계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최근 사회·경제적 이유로 비혼을 결심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나 역시 여러 이유로 결혼을 주저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내가 정상 가족의 범위에 포함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동거하며 오랜 시간 생활을 꾸렸을 때 과연 누가 나의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있을까? 누가 나의 법적 보호자가 돼야만 할까? 몇십년을 같이 산다고 해도 우리는 임대아파트에 당첨되기도 어려울 테고 주민세도 두배로 내야 될 거다. 큰 수술에 보호자 동의도 하지 못할 테고 통신사 가족할인도 못 받겠지. 하다못해 항공권 마일리지도 서로 쓸 수 없겠다. 이런 사소한 것에도 배제가 발생한다. 그럼 결혼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겠지.

그러나 세상에는 결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그러나 깊이 유대감을 느끼고 서로의 생활에 의무를 다하며 반평생을 함께 산 사람들도 있다. 수많은 동성애자 커플들이 그렇고 평생을 가족처럼 함께 산 친구 사이가 그러하다. 어쩌면 생활동반자법은 혼인과 혈연, 사랑으로만 인정받을 수 있는 기존의 결합 제도, 그리고 ‘정상 가족’ 관념에 반기를 드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배웠던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의 변화에서 이제는또다른 변곡점을 거쳐 흘러가고 있다. 그때 배웠던 엄마, 아빠(이성애 부모)와 자녀 1~2명으로 구성된 3~4인 핵가족 체제가 실은 현대 사회의 정상 가족에 속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더 많은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존재한다. 1인 가구, 한부모 가정, 비혼 가구,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 이주민 가정, 피나 결혼으로 묶이지 않은 채 함께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게이 커플, 레즈비언 커플 등.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한 형태의 가족 구성원, 동반자는 점점 더 늘어날 거다.

나의 가치관과 성소수자 친구들 때문에 생활동반자법이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 이렇게까지 실감한 적은 없었다. 응급실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커다란 허탈감과 허무함, 그리고 두려움을 느꼈다. 만약 내가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면? 어떤 사람들은 ‘결혼하면 되지’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냥, 그저, 결혼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서로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사람도 생활을 공유하고 인생을 의지하고 가사를 분담하고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며 오래 함께 미래를 떠올리는 두 사람이 적어도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 서로에게 든든한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추신. 스웨덴 친구의 말에 따르면 삼보 제도가 결혼과 가장 다른 점은 재산권 부분이라고 한다. 결혼의 경우 공동의 재산으로 인정돼 헤어지는 과정에서 분배 조정이 필요하지만 삼보는 결합부터 파기까지 각자의 재산은 각자의 것이다.

혜화붙박이장

진실을 후원해주세요
용기를 가지고 끈질기게 기사를 쓰겠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이 우리 사회에 드리운 어둠을 거둡니다.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31살 회사원 “감염돼도 곧 괜찮아져…굳이 접종 필요 있나” 1.

31살 회사원 “감염돼도 곧 괜찮아져…굳이 접종 필요 있나”

고령 미접종자들 “부작용이 더 겁나”…‘설득’ 숙제 받아든 위드 코로나 2.

고령 미접종자들 “부작용이 더 겁나”…‘설득’ 숙제 받아든 위드 코로나

“1.5룸 청소 100만원” 기사, 3년째 한국언론에 등장한 이유 3.

“1.5룸 청소 100만원” 기사, 3년째 한국언론에 등장한 이유

“죽은 지구에는 K팝도 없다”…지속가능한 ‘덕질’을 위해 4.

“죽은 지구에는 K팝도 없다”…지속가능한 ‘덕질’을 위해

국민의힘이 자초한 ‘11월5일 이후’ 고발 사주 의혹 수사, 여파는? 5.

국민의힘이 자초한 ‘11월5일 이후’ 고발 사주 의혹 수사, 여파는?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Weconomy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한겨레 데이터베이스 | 뉴스그래픽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더나은사회 | 탐사보도 | 서울&
스페셜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사업

맨위로
벗의 마음을 모아주세요
자유와 평등을 꿈꾸는 마음.
다른 이의 아픔에 눈물 흘리는 마음.
지구의 신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그 마음을 함께하는 한겨레와 걸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