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내 개혁 논의에 대한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와 이에 항의하는 전국 법원 판사회의가 잇따른 가운데 양승태 대법원장이 처음으로 직접 입장을 밝혔다.

양 대법원장은 17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글을 올려 “사법 행정의 최종적인 책임을 맡고 있는 저의 부덕과 불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무거운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현안에 대한 전국 법관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각급 법원에서 선정된 법관들이 함께 모여 현안과 관련해 제기된 문제점과 개선책을 진솔하고 심도 있게 토론하고 의견을 모을 수 있는 논의의 장을 마련하겠다”며 “법원행정처도 필요한 범위에서 이를 최대한 지원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시한을 정해 대법원장의 입장 발표를 요구한 각급 법원 판사회의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각급 판사회의가 함께 요구해온‘전국법관대표회의 개최’를 사실상 수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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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대법원장은 “이번 사태 이후 사법행정 방식의 환골탈태를 계획하기에 앞서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논의를 통해 법관들의 다양한 시각과 의견을 취합하는 과정이 빠져서는 안 될 것”이라며 “여러 법원의 판사회의에서 각급 법원의 법관 대표자들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해야 한다는 취지의 결의를 하는 뜻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태의 책임 등에 대해선 “대법원장이 혼자 결정하기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해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에 이를 부의했으며 그 심의 결과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블랙리스트가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컴퓨터 등에 대한 추가 조사와 징계 여부 및 범위 등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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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대법원장 사과도 없을뿐더러 행정처에 ‘블랙리스트 컴퓨터’ 제출에 협조하라든가 등의 지시도 없다”며 “법관대표회의에서 논의해 추가조사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른 부장판사는 “대법관 2명에 대한 제청 절차를 앞두고 있어 대법원으로서도 입장 발표를 미루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당분간은 전국법관대표회의 대표 선출 등 차분하게 논의를 준비하는 분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행정처는 법관대표회의에서 인사제도 등 사법행정 개혁 방안을 논의해 9월 이후로 예상되는 신임 대법원장 취임 이후 추진하도록 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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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법원 내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지난 2월 ‘사법독립과 법관인사 제도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관련 학술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법원행정처가 행사 축소를 지시하는 등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바 있다. 이에 이인복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돼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사실 등을 밝혀냈으나, 법원 내 블랙리스트 의혹 등에 대해선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논란이 계속됐다.

여현호 선임기자 yeopo@hani.co.kr